연풍순교성지

일반현황

  • 소재지 : 충북 괴산군 연풍면 중앙로홍문2길 14 [28013]
  • 전화 : (043)833-5064, 팩스 : 833-3386
  • 웹사이트 : www.ypseongi.org
  • 담임신부 : 김정민 스테파노 신부
박해가 계속되던 시절.
연풍의 산간 지역은 신앙을 지키려는 선조들이 문경 새재와 이화령을 넘어 경상도로 피신하는 길목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연풍에 도착해서 한숨을 돌렸고, 박해자들의 눈을 피해 고개를 넘는 순간에도 틈틈이 기도를 바치곤 했습니다.
최양업(토마스) 신부님과 프랑스 선교사 칼래(강 니콜라오) 신부님도 연풍을 거쳐 경상도와 충청도를 넘나들면서 교우촌을 순방했습니다. 그럴 때면 신부님들은 연풍 골짜기에 숨어살던 교우들을 방문하여 비밀리에 성사를 주었습니다.
이내 연풍은 경상도와 충청도의 신앙을 잇는 교차로가 되었고, 신앙 선조들의 보금자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1866년의 병인박해 때는 수많은 교우들이 이곳에서 체포되어 순교의 영광을 얻었습니다.
연풍 병방골(괴산군 장연면 방곡리)은 황석두 루가(1813~1866) 성인의 고향입니다.
그리고 연풍 성지는 성인의 묘소를 모시고 있는 곳입니다.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인 성인은, 부친께서 천주학을 버리든지 작두날에 목을 맡기든지 하라고 강요하자 결코 진리를 버릴 수는 없습니다라고 하면서 작두날에 목을 디밀었습니다. 이후 성인은 아내와 동정 부부로 살면서 일생을 교회에 헌신했습니다. 그러다가 병인박해 때 다블뤼(안돈이 안토니오) 주교님, 오메트르(오 베드로)와 위앵(민 루가) 신부님, 장주기(요셉) 회장님과 함께 충청도 갈매못(보령시 오천면 영보리)에서 군문효수형으로 순교했습니다.
성인의 시신은 갈매못에서 홍산 삽티(부여군 홍산면 상천리)를 거쳐 고향 병방골로 이장되었습니다. 그리고 오랜 노력의 결과 1979년에는 그 묘소가 발견되어 3년 뒤 연풍 성지로 천묘되었습니다.
작두날로도 막지 못한 황 루가 성인의 신심.
하느님께 약속한 대로 일생을 교회에 바쳤던 헌신적인 삶.
일찍이 성인의 이러한 열심을 알아챈 프랑스 선교사들은 그를 회장으로 임명하여 곁에 두었습니다. 이후 성인은 선교사들에게 한글과 한문을 가르치는 선생이 되었고, 선교사들의 교우촌 순방에 함께 했으며, 다블뤼 주교님을 도와 한글 교리서들을 편찬했습니다. 페롱(권 스타니슬라오) 신부님의 말씀대로 성인은 조선교구에서 가장 훌륭한 회장이었습니다.
언제나 신망애 삼덕과 기도 안에서 살았던 성인은 주교님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포졸들이 있는 곳으로 가서 자수했습니다. 그리고 끝까지 순교의 용덕을 보여주면서 즐거운 낯빛으로 휘광이의 칼날을 받아 순교했습니다.
평소에 원하던 대로 이 세상에서의 과거 대신 천상의 과거에 합격한 것입니다.
 
소백산맥의 심산유곡에 둘러싸여 충청도와 경상도의 경계를 이루는 이곳. 하늘에 닿을 듯한 소백산맥의 조령산(해발 1,017m)과 백화산(해발 1,064m) 사이로 구름도 쉬어 가는 험지 중의 험지. 저 구름마저도 단지 산이 높아서가 아니라 그 고갯길 굽이굽이에 서려 있는 민초()들의 슬픈 이야기와 피로 얼룩진 신앙의 숭고한 역사를 그냥 지나칠 수만은 없기 때문이리라.
연풍 남쪽의 주진리에서는 이화령(해발 548m)을 거쳐 경상도 문경으로 통하고, 그 북쪽의 원풍리에서는 새들도 넘기 힘들다는 새재(조령, 해발 642m)와 하늘재(계립령, 525m)가 그리 멀지 않다. 지금의 행정 구역은 충북 괴산군 연풍면. 조선 후기까지는 연풍현으로, 그곳 현감이 수많은 천주교 신자들을 체포해 와 형벌로 다스리곤 하였다.
연풍 지역에 첫 복음의 씨앗이 떨어져 작은 신앙 공동체가 형성된 것은 1784년 말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지 얼마 안되어서였다. 남한강 물길을 따라 북상한 복음의 한 자락이 충주를 거쳐 충청도의 끝자락인 이곳 연풍까지 도달했던 것이다. 그러나 1801년의 신유박해는 어린 싹을 틔우던 연풍의 신앙 공동체까지 그냥 내버려두지 않았다. 이 박해로 몇몇 교우들이 체포되어 서울로 이송되면서 김흥금과 몇몇 교우들은 경상도로 피신해 신앙 생활을 해야만 했고, 이항덕은 그대로 연풍에 남아 있다가 체포되어 귀양을 가야만 했다.
높다란 소백산맥 자락에 막혀 숨을 죽이던 있던 복음의 물줄기는, 신유박해 이후 영남의 관문인 이화령과 새재를 넘어 새 은신처를 찾아가는 억압받는 민초들에 의해 경상도 지역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박해의 서슬을 피해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그네들은 남부여대()한 채 어린 자식을 업거나 앞세우고, 삭풍을 이겨내면서 천혜의 도주로를 이용하여 험준한 산 속으로 숨어들었다. 다행히도 이화령의 굽이굽이, 문경 새재의 관문 한쪽에 있는 수구문()은 죄인 아닌 죄인, 도둑 아닌 도둑으로 포졸들에게 쫓기던 교우들을 보살펴 주었다.
이제 그 입구에 위치한 연풍의 비밀 신앙 공동체는 박해를 피해 이주해 오는 교우들과 새로 복음을 받아들인 입교자들로 인해 다시 살아나고 있었다. 동정 부부로 유명한 이순이(누갈다)의 어머니가 며느리손자들과 함께 피신해서 신앙 생활을 한 곳도 연풍이요, 황석두(루가) 성인이 만고의 진리를 찾은 곳도 이곳이다. 그 뿐인가. 한국인 사제 최양업(토마스) 신부, 상복으로 위장한 프랑스 사제 페롱(권 스타니슬라오) 신부, 칼래(강 니콜라오) 신부 등이 이화령과 새재를 넘어 영남 지역으로 전교를 다니면서 쉬어가던 곳도 연풍이었다.
연풍은 이처럼 초기 교회 때부터 신앙 공동체가 형성된 뿌리깊고 끈질긴 복음의 역사를 간직해 왔다. 연풍의 마을과 마을마다, 이화령과 문경 새재의 구석구석마다 신앙 선조들의 애환이 담겨 있다.
이곳의 복음사는 1866년에 흥선대원군이 일으킨 병인대박해로 인해 피의 순교사로 변하게 된다. 교우들은 이제 연풍 관아로 끌려가 모진 고문 끝에 죽음을 당하거나 쥐도 새도 모르게 도살장(연풍 옥터)이란 곳으로 끌려가 목숨을 바쳐야 했다.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잠시 목숨을 연명할 수 있었던 교우들도 충주서울 등지에서 다시 박해자의 칼날을 받아야만 했다.
이제 그 지방 사람들에게 도살장으로 알려진 바로 그 장소에 연풍 성지가 들어서 있다. 거룩한 땅이 아닐 수 없다. 이곳에 두 발을 디딘 채, 박해의 서슬이 시퍼렇던 그 당시에 이름 석자도 남기지 못하고 천주 대전에 숭고한 목숨을 바친 민초들은 과연 얼마나 되었을까를 생각하면 가슴이 저려온다. 그 모두가 우리 후손들에게 지고한 복음을 남겨 준 신앙 선조들이다.
<병인박해기 연풍 출신 순교자 현황>
성명(세례명) 순교일 순교장소 순교형식 비고
황 안드레아 1866. 9 서울 교수 황 루가 성인의 조카
추순옥 1866.10 청주 교수 회장
조 아우구스티노 1867. 2 공주 교수  
간 그레고리오 1867 홍주 교수  
김군심(베드로) 1867. 4 공주 장사 공주 → 연풍 → 공주로 이동
황 요한 1867 서울 교수 황 루가 성인의 양자
김 마르티노 1867 충주 장사 아래 마태오의 부친
김 마태오 1867 충주 장사 위 마르티노의 아들
조 베로니카 1868. 4 해미 교수  
이유일(안토니오) 1868. 5 서울 교수  
김 요셉 1868. 9 충주   기록 내용으로 볼 때, 같은 순교자로 추정됨
김원일 1868.윤4 충주 참수
전 바오로 1869. 4 충주 참수  
1850년의 초여름. 문경에서 이화령을 넘어 충청도로 향하는 두 명의 사내가 있었다. 한 명은 쉰이 다 되어 보이는 상민 차림이었고, 또 다른 한 명은 서른쯤 되어 보이는 젊은 양반 차림이었다. 그러나 모두가 입은 옷이 좀 남루해 보였다. 그 둘은 힘겹게 고개를 넘으면서 중간중간 쉬는 동안에도 무언가를 중얼거리는 듯했고, 서로 이야기를 나눌라치면 상민 차림의 어른은 젊은이를 상전 모시듯이 깍듯하게 대했다.
그 젊은이가 바로 그 전 해에 상해에서 사제로 서품되어 귀국한 두 번째 조선인 사제 최양업(, 18211861년) 토마스 신부였다. 그리고 그보다 어른은 문경 교우촌에서부터 충청도 북부 지역으로 사제를 안내하던 연풍의 회장이었다. 최 신부는 그 해의 사목 순방에서 이제 막 전라도와 경상도 남북부의 순방을 모두 마친 터였다.
최양업 신부는 이때부터 곳곳에 숨어살고 있는 신자들을 찾아 해마다 경상도와 충청도를 오가야만 했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페롱 신부가 경상도 북부와 강원도의 신자들을 찾아 성사를 주었고, 최 신부가 선종한 뒤로는 칼래(N. Calais, 니콜라오) 신부가 경상도 신자들을 방문하곤 하였다.
그들은 순방 때마다 이화령을 넘거나 문경 새재를 넘지 않으면 안되었다. 민초들이 복음의 끈을 잇기 위해 넘던 고개. 특히 새재는 문경에서부터 제1관문(주흘관), 제2관문(조곡관), 제3관문(조령관)을 거쳐야만 했기 때문에 관문을 지키는 파수꾼에게 발각될 위험이 있었고, 그래서 허물어진 성벽 사이로 나 있는 샛길로 빠지거나 조령관의 수구문()을 이용해야만 하였다. 이렇게 그들이 흘린 땀방울은 새재 수구문으로 흐르는 계곡 물과 하나가 되어 조령천으로 흘러 들어갔다.
연풍 주막은 그들에게 또 하나의 관문이나 다름이 없었다. 프랑스 선교사들이 아무리 상복으로 위장을 했다 하더라도 걸음걸이와 풍채에서 풍기는 것이 달랐고, 혹시 방갓 안에 감춘 얼굴이라도 드러나는 날이면 아주 큰일이었다.
그래도 그들은 조선의 알프스 골짜기마다 숨어 살아가는 민초들을 찾아 성사를 주는 것을 최상의 낙으로 삼았다. 특히 연풍이나 문경과 같이 비밀 신앙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교우들은 교리 실천에 열심이었고, 아주 신심이 깊었으므로 더욱 기쁜 일이었다. 최양업 신부는 이렇게 적고 있다.
교우들은 거의 모두 비신자들이 경작할 수 없는 험악한 산 속에서 비신자들과 아주 멀리 떨어져서 살고 있습니다. 이런 교우들은 거의 다 교리에도 밝고, 천주교 법규도 열심히 잘 지키고 삽니다. 그래서 열심한 교우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죄악과 세속의 모든 관계를 끊고 조선의 알프스라고 할 수 있는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가 담배와 조를 심으며 살아갑니다.
이처럼 이화령과 새재를 넘던 최양업 신부는 1861년 6월, 문경 땅 진안리의 한 주막에서 과로가 겹친 데다가 장티푸스까지 걸려 며칠 후 선종하였다. 그리고 선종한 곳에 가매장되었던 그분의 시신은 그 해 겨울 배론 신학교 뒷산으로 옮겨져 안장된다. 영남 선비들이 청운의 꿈을 안고 넘던 험로가 진정한 땀의 순교자 최양업 신부의 마지막 길이 된 것이다.
칼래 신부가 새재의 구비구비를 넘어 영남으로 향하곤 했던 것은 1863년 이후였다.
1866년 2월의 어느 날. 칼래 신부는 경상도의 한 교우촌에서 베르뇌 주교와 동료 선교사들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접하였다. 그래서 사목 순방을 중단한 채 문경의 한실 교우촌(현 경북 문경시 마성면 상내리)에 은거했지만, 이곳 교우들이 화를 입을까 염려해서 다른 곳으로 피신했다가 다시 한실로 돌아왔다. 그리고 부활 대축일을 지낸 4월 초에는, 유 토마스의 안내를 받아 충청도 교우들에게 가려고 이화령을 넘다가 연풍 주막 근처에서 그만 포졸들에게 검문을 당하고 말았다.
거기 어디로 가는 길손이요? 토마스가 대답했다. 충주로 가는 나그네요.
혹시 조정에서 체포하라는 천주학쟁이들이 아닌가? 아니, 우린 천주학 같은 것 모르오.
그래도 알 수 없으니, 주막으로 가서 조사해 보아야겠소.
방갓으로 얼굴을 감추고 있던 칼래 신부는 앞서 가면 따라가겠소 하면서 포졸들이 한눈을 파는 사이에 줄행랑을 놓았다. 저놈이 도망간다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돌아보지도 않고 있는 힘을 다해 뛰었다. 그때 하느님의 섭리가 당신의 종을 위해 여기에 개입하셨다.
포졸들이 저를 쫓아오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때 하느님의 섭리가 작용하시어, 제 허리춤에 차고 있던 엽전 550닢이 든 전대 끈이 풀러지게 하셨습니다. 전에는 제가 돈을 지닌 적이 없었는데, 이번에는 우연히도 제가 전대를 차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제 목숨을 구해주려고 하신 것이 분명합니다. 포졸들은 눈으로 엽전들을 볼 필요도 없었지요. 왜냐하면 엽전들이 돌멩이에 부딪히는 소리만 들어도 그들의 귀가 번쩍 뜨이는 일이니까요. 포졸들이 서로 엽전들을 주우려고 하는 틈을 타서 저는 멀리 내달았습니다.
칼래 신부는 이렇게 가까스로 체포되는 것을 면하고, 며칠 동안 산 속을 헤맨 뒤에야 한실로 돌아올 수 있었다. 또 연풍에서 잡혔던 복사 토마스가 하느님과 성모님의 도우심으로 풀려 나오자 교우들과 함께 감사의 미사를 봉헌하였다. 그런 다음 5월 10일에는 한실을 출발, 진천 삼박골 교우촌(현 충북 진천군 백곡면 양백리)을 거쳐 자신의 사목 중심지인 목천 소학골 교우촌(현 충남 천안시 북면 납안리)에 도착하였다. 주님께 감사 !
이후 칼래 신부는 조선을 떠나 중국으로 탈출한 뒤에도, 프랑스로 귀국한 뒤에도 연풍 주막에서 있었던 일을 결코 잊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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