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담화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제109차 세계 이주민과 난민의 날 담화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제109차 세계 이주민과 난민의 날 담화(2023년 9월 24일)
이주할지 또는 머무를지 선택할 자유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 시대에 이주의 물결은 복합적이고 다양한 현상의 표현으로, 이를 올바로 이해하려면 출발부터 도착까지 여러 이주 단계에 대하여 본국으로 돌아갈 가능성을 비롯한 모든 측면에서 면밀히 분석하여야 합니다. 저는 이러한 노력에 기여하고자 제109차 세계 이주민과 난민의 날 담화에서, 본국을 떠나는 선택에 언제나 지표가 되어야 할 자유를 다루기로 하였습니다.
“떠날 자유와 머무를 자유”는, 이탈리아 주교회의가 몇 해 전에 오늘날 이주의 도전에 대한 구체적 응답으로 마련하였던 연대 계획의 제목이었습니다. 개별 교회에 대한 주의 깊은 경청을 통하여 저는 그러한 자유의 보장이 많은 지역의 공통된 사목적 관심사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꿈에 주님의 천사가 요셉에게 나타나서 말하였다. ‘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여, 내가 너에게 일러줄 때까지 거기에 있어라. 헤로데가 아기를 찾아 없애 버리려고 한다’”(마태 2,13).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를 특징지었던 수많은 이주는 물론이거니와 성가정의 이집트 피신도 자유로운 선택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주는 언제나 자유로운 선택이어야 하지만 많은 경우에, 심지어 오늘날조차 그렇지 못합니다.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분쟁이나 자연재해, 또는 더 단순하게는 모국에서 품위 있고 번영하는 삶을 살아갈 수 없기에 떠나도록 내몰리고 있습니다. 2003년에 이미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이주민과 난민에 관한 평화의 구체적인 조건을 갖추기 위해서는 이 사람들의 이주하지 않을 권리, 곧 모국에서 인간의 품위를 지니며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는 권리를 지키기 위하여 진지하게 노력하여야 합니다”(제90차 세계 이주민과 난민의 날 담화, 3항).
“그들은 가나안 땅에서 얻은 가축과 재산을 가지고 이집트로 들어갔다. 야곱과 그의 모든 자손이 함께 들어갔다”(창세 46,6). 심각한 기근 때문에 야곱과 온 가족은 이집트로 피신할 수밖에 없었고, 그곳에서 야곱의 아들 요셉은 그들 가족의 생존을 확보하였습니다. 오늘날 강제 이주를 일으키는 가장 눈에 띄는 원인은 박해, 전쟁, 기상 현상, 극심한 빈곤 등입니다. 이주민들은 가난하기에, 또는 두려움이나 절망 때문에 피신합니다. 이러한 원인들을 제거하여 강제 이주를 종식하려면 각자 지닌 책임에 따라 모든 이가 공동의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이러한 노력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또 나아가 어떤 행위를 그만두어야 하는지 묻는 데에서 시작됩니다. 우리는 군비 경쟁, 경제적 식민주의, 다른 이들의 자원 약탈, 우리 공동의 집 훼손을 멈추기 위하여 온갖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신자들은 모두 함께 지내며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그리고 재산과 재물을 팔아 모든 사람에게 저마다 필요한 대로 나누어 주곤 하였다”(사도 2,44-45). 초기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이상은 오늘날의 현실과 꽤 거리가 있는 듯합니다! 이주가 참으로 자유로운 선택이 되게 하려면, 모든 이가 공동선에 동등하게 참여하고 기본권을 존중받으며 온전한 인간 발전을 누릴 수 있도록 보장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이렇게 할 때라야만 우리는 모든 이가 저마다 개인이든 가정에서든 품위 있고 성취하는 삶을 살아가게 할 수 있습니다. 주된 책임은 모국과 좋은 정치를 실현하도록 부름받은 모국의 지도자들에게 있음이 분명합니다. 좋은 정치란 투명하고 정직하며 미래 지향적이고 모든 이에게, 특히 가장 힘없는 이들에게 봉사하는 것입니다. 그와 동시에, 모국의 지도자들은 천연자원과 인적 자원을 강탈당하지 않고 소수의 이익을 불리려는 외세의 간섭에서 벗어나 좋은 정치를 실현할 권한을 부여받아야 합니다. 이주할지 또는 머무를지 선택할 수 있는 여건에서는, 그 선택에 대하여 잘 알고 신중하게 고려할 수 있도록 보장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수많은 남성과 여성, 어린이가 위험한 환상에 빠지거나 파렴치한 인신매매범들의 희생자로 전락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 희년에 너희는 저마다 제 소유지를 되찾아야 한다”(레위 25,13). 이스라엘 백성에게 희년의 경축은 집단적 정의 행위를 의미하였습니다. “모든 이가 모든 부채를 탕감받고 땅을 되찾으며 하느님 백성의 일원으로서 자유를 누릴 기회를 다시 얻어 본디의 상태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수요 일반 알현 교리 교육, 2016.2.10.). 2025년 희년을 향하는 우리가 희년 경축의 이러한 측면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모든 이가 이주로 내몰리지 않을 권리를, 곧 모국에서 평화롭고 품위 있게 살아갈 기회를 누리도록 보장하려는 각국 그리고 국제 사회의 공동 노력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권리는 아직 법제화되지 못한 문제만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리고 이 권리의 보호는 국경을 뛰어넘는 공동선에 대한 모든 나라의 공동 책임으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실제로 이 세상의 자원은 무한하지 않기에, 경제적으로 가장 가난한 나라들의 발전은 모든 나라가 창출할 수 있는 나눔의 역량에 달려 있습니다. 오랜 과정이 필요한 이 권리가 보장되는 날까지 많은 이들이 더 나은 삶을 위하여 여전히 이주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였다. 또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내가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으며, 내가 감옥에 있을 때에 찾아 주었다”(마태 25,35-36). 이 말씀은 이주민에게서 단순히 어려움에 놓인 형제자매만이 아니라 우리의 문을 두드리시는 그리스도 바로 그분을 알아보아야 한다고 끊임없이 권고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주가 어떤 경우에도 자유로운 선택의 결과가 되도록 보장하고자 노력하는 가운데 이주민 저마다의 존엄을 최대한 존중하도록 부름받았습니다. 이는 장벽이 아니라 다리를 건설하고, 안전하고 정규적인 이주를 위한 통로를 넓히면서, 이주의 물결을 있는 힘껏 더 잘 동반하고 관리하라는 뜻입니다. 모국이든 타국이든 우리가 미래를 이루어갈 자리로 선택한 어디에서든, 중요한 것은 아무도 차별하지 않고 배제하지 않으며 언제나 모든 이를 환영하고 보호하며 증진하고 통합할 준비가 된 공동체가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
교회인 우리가 시작한 이 시노달리타스의 길은, 수많은 이주민과 난민을 포함한 가장 힘없는 이들 안에서 우리 형제자매로서 사랑받고 보살핌받아야 할, 우리 여정의 특별한 동반자를 알아보도록 우리를 이끌어 줍니다. 우리는 함께 걸어야만 멀리 갈 수 있고 우리 여정의 공동 목표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로마 성 요한 라테라노 대성전에서
2023년 5월 11일
프란치스코
신고사유를 간단히 작성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