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가르침

교회가르침충만한 현존을 위하여- 소셜 미디어 참여에 관한 사목적 성찰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23-08-21 조회수 : 1264

교황청 홍보부

충만한 현존을 위하여


소셜 미디어 참여에 관한 사목적 성찰



(Towards Full Presence

A Pastoral Reflection on Engagement with Social Media)


1) 디지털 시대에 들어와 위대한 진보들이 이루어져 왔지만, 여전히 다루어야 할 시급한 사안들 가운데 하나는 디지털 세계 안에서 개인으로도 교회 공동체로도 우리가 ‘디지털 고속도로’(digital highways)를 따라 함께하는 공동의 여정에서 참으로 현존하고 서로를 배려하는 ‘사랑의 이웃’으로서 어떻게 살아갈까 하는 문제입니다.


기술의 발전은 새로운 종류의 인간 상호작용을 가능하게 만들었습니다. 사실, 문제는 더 이상 디지털 세계에 참여할지 말지가 아니라 어떻게 참여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특히 소셜 미디어는, 사람들이 예전과 사뭇 다른 상호작용을 하고 체험을 공유하며 관계를 일구는 환경입니다. 그렇지만 그와 동시에 인공 지능이 커뮤니케이션에 점점 더 영향을 주고 있기에, 바로 이러한 바탕에서 인간의 만남을 재발견하여야 할 필요성이 생겨납니다. 최근 20여 년 사이 우리와 디지털 플랫폼의 관계는 돌이킬 수 없는 변화를 겪었습니다. 이러한 플랫폼들은, 우리가 그저 수동적으로 이용하는 장이 아니라 공동 창조 공간으로 진화할 수 있다는 인식이 생겨났습니다. 기성세대도 마찬가지지만, 젊은이들은 소셜 미디어를 비롯하여 그들이 있는 그 자리에서 만남이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 디지털 세계는 “젊은이들의 정체성과 삶의 방식에서 중요한 일부”1)이기 때문입니다.


2) 디지털 문화의 한 표현인 소셜 미디어는 우리의 신앙 공동체와 우리 개인의 영적 여정에 모두 깊은 영향을 주고 있기에, 많은 그리스도인이 영감과 인도를 청하고 있습니다.


소셜 미디어에 대한 신실하고 창의적인 참여의 모범은 이러한 디지털 플랫폼 안에서 자신의 신앙을 증언하는 전 세계의 개인뿐만 아니라 지역 공동체들에서도 풍성히 쏟아져 나오며 때로는 제도적 교회 안에서보다 더 널리 전해지고 있습니다. 또한 여러 지역 교회, 운동, 공동체, 수도회, 대학교, 개인이 전개하는 수많은 사목적 교육적 계획들에도 존재합니다.


3) 보편 교회는 디지털 현실 또한 다루어 왔습니다. 예를 들어, 1967년부터 해마다 발표된 홍보 주일 담화는 이 주제에 관한 성찰을 이어왔습니다. 1990년대를 시작으로 컴퓨터 활용을 다루었고 2000년대 초반부터 디지털 문화와 소셜 커뮤니케이션의 여러 측면을 꾸준히 성찰해 왔습니다. 2009년, 베네딕토 16세 교황께서는 디지털 문화에 대한 근본적 질문들을 제기하여 미디어가 사람들 사이의 결속을 증진할 뿐만 아니라 “존중과 대화와 우정의 문화”2)를 증진하는 관계에 헌신하도록 사람들을 격려하여야 한다고 말씀하시면서, 커뮤니케이션 형태들의 전환을 다루셨습니다. 이후, 교회는 “수단”으로서만이 아니라 “공간”으로서의 소셜 미디어의 이미지를 확립하여, 디지털 환경에서도 기쁜 소식을 선포하도록 요청하였습니다.3)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디지털 세계가 “일상생활 영역과 구분되지 않을 정도”이며 이는 인류가 지식을 쌓고 정보를 전달하며 관계를 발전시키는 방식을 변화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셨습니다.4)


4) 이러한 성찰에서 더 나아가 실제로 교회의 소셜 미디어 활용 또한 효과적이었습니다.5) 교회 직무에서 디지털 매체가 강력한 도구가 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 준 순간이 최근에 있었습니다.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의 세계적 유행이 아직은 초기 단계이던 2020년 3월 27일, 성 베드로 광장은 텅 비어 있었지만 현존으로 충만하였습니다. 텔레비전과 라이브 스트리밍 중계는,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봉쇄 조치된 세상에 전하는 기도와 메시지라는 전 세계적 변화의 체험을 이끄시게 하였습니다. 수백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보건 위기 한가운데에서 격리되고 고립된 전 세계 사람들은 그들 서로 그리고 베드로의 후계자와 깊은 일치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였습니다.6)


교황 성하의 기도는 전통 매체와 디지털 기술을 통하여 여러 가정에 가 닿아 전 세계 사람들의 삶을 어루만져 주었습니다. 성 베드로 광장을 둘러싼 베르니니의 주랑은 그 열린 품으로 수백만의 인파를 품어 안을 수 있었습니다. 비록 물리적으로는 서로 멀리 있지만 그 풍랑의 때에 교황님과 함께한 이들은 그들 서로에게 현존하며 일치와 친교의 순간을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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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이어지는 본문은 전문가, 교사, 젊은 전문직 종사자와 지도자, 평신도, 성직자, 수도자가 참여한 성찰의 결과물입니다. 그 목적은, 그리스도인이 소셜 미디어를 어떻게 활용하여야 하는지에 관한 주요 질문들 몇 가지를 다루려는 것입니다. 소셜 미디어 분야의 사목을 위한 정확한 ‘지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대신에, 서로 이웃이 되는 문화를 촉진할 수 있는 창의적이고 건설적인 접근법을 택하도록 개개인과 공동체 모두를 격려하여 우리의 디지털 체험에 대한 공동의 성찰을 증진하기를 희망합니다.


소셜 미디어에서 평화롭고 의미 있으며 배려하는 관계를 증진하는 도전은 교회에서뿐만 아니라 학계와 전문 분야에서의 토론을 촉구합니다. 어떤 형태의 인류애가 디지털 환경 안의 우리 현존에 반영되고 있습니까? 얼마나 많은 우리의 디지털 관계가 깊고 진실한 소통의 결실이거나, 아니면 그저 반론의 여지도 없는 의견들과 수동적 반응들로 이루어진 것입니까? 우리의 신앙은 생생하고 활기찬 디지털 표현을 얼마나 많이 발견합니까? 그리고 소셜 미디어에서 누가 나의 ‘이웃’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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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7)는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라고 한 율법 교사의 질문으로 촉발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통하여 우리를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라는 질문에 대답하게 만드십니다. ‘받는다’라는 동사는 약속된 땅의 상속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 땅은 지리적 영토라기보다는 오히려 더욱 심오하고 항구한 그 무엇을, 모든 세대가 새롭게 발견하여야만 하며 디지털 세계에서 우리의 역할을 재고하도록 우리를 도와줄 수 있는 그 무엇을 상징합니다.


I. 디지털 고속도로의 함정 조심하기


강도들의 손아귀에 떨어진 사람의 관점에서 보는 법 배우기(루카 10,36 참조)


새롭게 발견하여야 할 약속된 땅?


7) 소셜 미디어는 인간 생활의 많은 과제와 차원을 디지털 플랫폼으로 이전하는 과정인 매우 폭넓고 복합적인 디지털화(digitization)의 한 부분일 뿐입니다. 디지털 기술은 효율성을 높이고, 경제를 부양하며, 이전에 풀지 못한 문제들을 해결하도록 우리를 도와줄 수 있습니다. 디지털 혁명은 정보에 대한 접근성을 넓히고 물리적 거리의 한계를 뛰어넘어 서로 접속하는 힘을 키웠습니다. 이미 지난 30년 동안 진행되던 과정이 감염병의 세계적 유행으로 더욱 가속화되었습니다. 대개 대면으로 이루어지던 교육과 업무 등의 활동이 이제는 원거리에서 가능합니다. 또한 여러 나라가 대면 회의에 대한 대안으로 온라인 회의와 표결을 채택함으로써 사법과 입법 체계에 유의미한 변화를 이루었습니다. 정보 전파의 신속성은 정치의 운용 방식도 바꾸고 있습니다.


8) 웹 5.0의 출현과 그 밖의 커뮤니케이션 발전들과 함께, 다가올 미래에는 인공 지능의 역할이 우리의 현실 경험에 더욱 영향을 끼칠 것입니다. 우리를 위하여 일하고 결정을 내리며 우리의 행동을 배우고 예측할 수 있는 기계의 발전을 목격하고 있습니다. 우리 감정을 감지할 수 있도록 피부에 부착하는 센서들, 우리의 질문에 응답하며 우리가 하는 대답에서 배우거나 반어법을 사용하고 우리 곁을 떠난 이들의 목소리와 어조로 말을 거는 기기들이 발전하고 있습니다. 이 끊임없이 진화하는 현실 속에서 많은 질문이 여전히 응답을 기다립니다.8)


9) 인터넷이 생겨난 이래로 세상이 경험해 온 괄목할 만한 변화가 새로운 긴장도 촉발시켰습니다. 이러한 문화 안에 태어난 어떤 이들은 ‘디지털 원주민’이고, 또 어떤 이들은 ‘디지털 이주민’으로서 여전히 이 문화에 익숙해지려고 분투하고 있습니다. 어떻든 우리의 문화는 이제 디지털 문화입니다. ‘디지털’ 대 ‘대면’이라는 진부한 이분법을 극복하고자 어떤 이들은 더 이상 ‘온라인’ 대 ‘오프라인’이라고 말하지 않고, 다양한 표현 안에 인간적 삶과 사회적 삶을 통합하여 디지털 공간에 있든 물리적 공간에 있든 그저 ‘온라이프’(onlife)라고 말합니다.


10) 소셜 미디어는 커뮤니케이션 과정들이 융합되어 이루어진 통합 커뮤니케이션 상황에서 일상의 삶에 대한 우리의 가치관, 신념, 언어, 추론이 형성되는 광장(forum)으로서 결정적 역할을 합니다. 나아가 많은 이들에게, 특히 개발도상국에 사는 이들에게 디지털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유일한 창구는 소셜 미디어입니다. 우리는 소셜 미디어를 도구로 이용하는 행위를 능가하여 소셜 미디어에서 공유를 체험함으로써 이를 중심으로 형성된 생태계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정보나 오락을 찾아 여전히 웹사이트를 이용하는 한편, 소속감과 긍정을 얻으려고 소셜 미디어에 의지하고, 이를 핵심 가치와 신념들이 생겨나는 중심 자리로 변화시킵니다.


이러한 생태계 안에서 사람들은, 예컨대 세상을 더욱 가까이 이어 준다거나 모든 이에게 아이디어의 창조와 공유 권한을 주거나 발언권을 주겠다는 등의 약속을 하는 소셜 미디어 기업들의 사명 선언문이 지닌 진정성을 믿으라는 요청을 받습니다. 기업들은 이윤에 훨씬 더 많은 관심을 두고 있기에 이렇게 광고하는 표어들 대부분이 결코 실현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우리는 여전히 그 약속을 믿으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11) 실제로, 사람들은 불과 몇십 년 전에 인터넷 사용이 시작되던 당시부터 이미 이러한 꿈을 공유하고 있었습니다. 곧, 디지털 세계가 공통된 이해와 자유로운 정보와 협력이 있는 행복한 장소가 되리라는 희망입니다. 인터넷은 사람들이 투명성, 신뢰, 전문적 식견을 바탕으로 공유된 정보에 의지할 수 있는 ‘약속의 땅’이 될 것이었습니다.


피하여야 할 함정들


12) 그러나 이러한 기대들은 빗나갔습니다.


우선 우리는 ‘디지털 격차’와 여전히 씨름하고 있습니다. 디지털 진화는 우리가 제대로 이해할 수 없도록 빠르게 일어나고 있기에 많은 이들이 식량, 물, 의복, 주거, 보건 의료와 같은 기초 필수품은 물론 정보 커뮤니케이션 기술에도 여전히 접근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엄청난 수의 소외된 사람들이 길가에서 꼼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소셜 미디어 격차’도 극심해지고 있습니다. 공동체를 건설하고 세상을 더욱 가까이 이어 준다고 약속하는 플랫폼들은 오히려 다양한 형태의 분열을 심화시키고 있습니다.


13) ‘디지털 고속도로’에서 알아야 할 몇 가지 함정들이 있습니다. 이로써 우리는 그러한 분열이 어떻게 생겨날 수 있는지를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소셜 미디어’의 상업적 가치를 생각하지 않고서는 소셜 미디어를 말할 수 없습니다. 곧, 상표와 제도가 소셜 플랫폼의 전략적 잠재성을 인식하였을 때에 실생활의 혁명이 일어나 십수 년 사이 사용자를 소비자로 변화시킨 언어와 관행을 재빨리 공고화하는 데에 기여하였다는 점을 인식하지 않고서는 소셜 미디어를 말할 수 없습니다. 나아가 개인은 소비자이면서 또한 상품이기도 합니다. 소비자로서의 개인은 데이터 기반 광고와 협찬 콘텐츠를 개인 맞춤형으로 제공받습니다. 상품으로서의 개인은, 그들의 프로필과 데이터가 상품 판매 목적을 지닌 일부 기업에 판매됩니다. 또한 사람들은 소셜 미디어 기업의 사명 선언문을 추종하며 대개는 읽지도 않거나 이해하지도 못하는 ‘이용 약관’도 받아들입니다. 통상적으로 이러한 ‘이용 약관’은 “상품의 대가를 치르지 않는다면 당신이 바로 상품”이라는 오랜 격언에 따라 이해됩니다. 다시 말하자면 공짜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관심을 기울이는 시간만큼 그리고 데이터 용량만큼 대가를 치르고 있습니다.


14) 지식, 데이터, 정보의 배포와 거래를 점점 더 강조함으로써 모순이 생겨났습니다. 정보가 이토록 중요한 역할을 하는 사회에서, 디지털 방식으로 배포되는 정보의 출처와 정확성은 입증하기가 더욱더 어렵습니다. 콘텐츠 과부하는, 우리가 인지하거나 깨닫기 쉽지 않은 요인들에 기반하여 무엇을 보여줄지 끊임없이 결정하는 인공 지능 알고리즘으로 해소됩니다. 그러한 요인들에는 우리가 전에 하였던 선택, 좋아요, 반응, 또는 선호 표시만이 아니라 우리의 부재, 흥미 잃음, 중단, 관심의 주기까지 들어갑니다. 각자가 보는 디지털 환경, 심지어 온라인 탐색 결과조차도 결코 다른 사람이 보는 것과 동일하지 않습니다. 검색 프로그램에서 정보를 찾거나 다양한 플랫폼과 애플리케이션에 대한 피드를 통하여 정보를 받으면서도 우리는 대체로 결과들을 통제하는 필터를 의식하지 못합니다. 이처럼 결과들의 더욱 정교한 개별화는 편향된 정보에 대한 강제 노출로 이어지고, 이는 우리의 생각을 확증하고 신념을 강화하여 결국 우리를 ‘필터 버블’(filter bubbles, 역자 주: 인터넷 정보 제공자가 개인의 취향이나 선호도를 분석하여 고른 정보만 제공함에 따라 이용자는 선별된 정보만을 받는 현상) 안에 고립시켜 버리고 맙니다.


15) 소셜 미디어상의 온라인 공동체들은 대개 ‘네트워크화된 개인들’의 공통 관심사를 둘러싸고 형성된 ‘만남의 지점들’입니다. 온라인 플랫폼과 검색 엔진의 배후에 있는 알고리즘이 사람들을 온라인에 잡아두려고 ‘동류인’을 한데 묶고 그룹으로 나누며 그들의 이목을 끌곤 하기에, 소셜 미디어에 존재하는 이들은 고유한 특징, 출신, 취향, 선호에 따라 다루어집니다. 따라서 소셜 미디어 플랫폼은, 그 이용자들이 서로 다른 ‘타인’과 참된 만남을 하지 못하게 방해할 위험에 놓일 수 있습니다.


16) 우리는 모두 이러한 개별화된 ‘자리들’을 만들고 때로는 극단적 행동을 부추길 위험이 있는 자동화된 시스템을 목격하여 왔습니다. 공격적이고 부정적인 발언들은 쉽고 빠르게 퍼져나가 폭력, 남용, 허위 정보가 빨리 증식하기 좋은 토양을 제공합니다. 소셜 미디어에서는 흔히 익명성 뒤에 숨어 대담해진 제각각의 주체들이 끊임없이 상호작용하고 있습니다. 대체로 이러한 상호작용은 우리의 행동이 타인의 언어적 비언어적 반응들에 영향을 받는 물리적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상호작용과 뚜렷이 구별됩니다.


17) 이러한 함정들을 인식하는 일은 소셜 미디어 환경을 혼탁하게 만드는 논리를 식별하고 그 가면을 벗기도록, 그리고 그러한 디지털 불만족에 대한 해결책을 찾도록 우리를 도와줍니다. 디지털 세계를 인지하고 이를 우리 삶의 일부로 인정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삶과 여정은 바로 디지털 경험과 물리적 경험의 상보성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18) 많은 이들이 ‘디지털 고속도로’에서 일어나는 분열과 증오로 말미암아 상처를 입습니다. 우리는 이를 도외시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저 침묵하며 지나가는 행인이 될 수 없습니다. 디지털 환경을 인간적이게 하려면 ‘뒤에 남겨진’ 이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나오는 다친 사람의 관점에서 보아야만 우리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다친 사람이 무엇을 보았는지 전하는 그 비유에서처럼, 디지털에서 소외되고 상처 입은 이들의 관점은 오늘날 점점 더 복잡해지는 세상을 더욱 잘 이해하도록 우리를 도와줍니다.


관계들을 엮어나가기


19) 우리가 점점 분열되고 각자 자기 필터 버블 안에만 웅크리는 이 시대에, 소셜 미디어는 많은 이를 무관심, 양극화, 극단주의로 끌고 가는 길이 되고 있습니다. 개인들이 서로를 인간으로 대하지 않고 공유점이 없는 특정 관점의 표현들로만 대할 때, 우리는 ‘무관심의 세계화’ 그리고 ‘무관심의’ 일반화를 퍼뜨리는 ‘쓰고 버리는 문화’의 또 다른 표현을 목격합니다. 사리사욕에만 틀어박히는 일은 희망을 회복하는 길이 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앞으로 나아가는 길은 서로 다른 사람들 사이에 우정과 평화를 증진하는 ‘만남의 문화’를 조성하는 것입니다.9)


20) 따라서 다른 이들을 만나고자 ‘동류’ 집단을 벗어나, 저마다의 이른바 사일로(silos, 역자 주: 큰 탑 모양의 곡식 저장소를 뜻하는 말로, 각 조직이나 단위가 서로 벽을 쌓고 소통과 협력 없이 자기 이익만 추구하는 체제를 말한다)를 넘어서기 위하여 소셜 미디어 플랫폼에 참여할 필요가 점점 시급하여집니다.


‘다른 이’, 곧 나와 반대되는 지위에 있거나 ‘다르게’ 보이는 누군가를 환대하기란 분명 쉬운 과제가 아닙니다. “나와 무슨 상관이지?” 하는 것이 우리가 보이는 첫 번째 반응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태도를 성경에서도 찾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태도는 자기 아우를 지키는 사람이 되기를 거부한 카인(창세 4,9 참조)에서 시작하여,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루카 10,29) 하고 예수님께 묻는 율법 교사로 이어집니다. 율법 교사는 누가 나의 이웃이고 나의 이웃이 아닌지 경계를 짓고 싶었습니다. 우리가 우리 무관심에 대한 타당한 구실을 찾고자 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우리는 늘 ‘우리’와 ‘그들’, ‘존중으로 대하여야 하는 사람’과 ‘무시하여도 되는 사람’ 사이에 선을 긋고자 애씁니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부지불식간에, 마치 타인의 고통은 그들 자신의 책임이고 우리와는 상관없다는 듯이10) 타인에게 연민의 감정을 느끼지 못하게 됩니다.


21)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오히려 디지털의 ‘쓰고 버리는 문화’를 직면하라고, 그리고 타인에게 다가가는 자발적인 노력을 기울임으로써 우리가 안주하고 있는 곳에서 벗어나도록 서로 도우라고 도전을 제기합니다. 이는 우리 저마다가 상처 입은 인류의 일원임을 깨닫고, 누구인가 우리를 바라보고 우리에게 가엾은 마음을 품었음을 기억하면서 우리 자신을 비울 때 비로소 가능한 일입니다.


22) 바로 이렇게 할 때 우리는 무관심을 극복하기 위한 첫걸음을 내딛는 이들이 될 수 있습니다. 또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이는 “하느님께서는 무관심하지 않으시다.”11) 하고 우리가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나는 실제로 다른 이들에게 얼마나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하는가?” 하는 물음을 멈추고 그 대신 이웃으로서 행동하기 시작하면서, 배척의 논리를 거부하고 공동체의 논리를 재건하는 이들이 될 수 있고 또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12) 우리는 개인 경험으로 디지털 매체를 이해하는 데서부터 공동체 건설을 증진하는 상호 만남에 토대를 둔 디지털 매체 이해로 나아가는 이들이 될 수 있고 또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23) 우리는 개인으로 행동하며 콘텐츠를 제작하거나 다른 이들이 공유한 정보, 발상, 이미지에 반응하는 대신 이렇게 질문하여야 합니다. ‘어떻게 우리는 사람들이 상호 경청의 정신으로 대화에 참여하고 불일치를 극복할 수 있는 더 건강한 온라인 경험을 공동 창출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소셜 미디어 플랫폼에서 분열을 극복하고 대화와 존중을 촉진하는 길을 찾도록 공동체들에 어떻게 힘을 실어줄 수 있을까요?


우리는 상호 신뢰에 바탕을 둔 나눔, 협력, 소속감의 자리가 될 수 있고 또 그렇게 되도록 온라인 환경을 어떻게 회복시킬 수 있을까요?’


24) 모든 이는 다른 이들과 함께 참여함으로써 그리고 다른 이들과의 만남 안에서 스스로에게 도전함으로써 이러한 변화를 가져오는 데에 이바지할 수 있습니다. 믿는 이들인 우리는 의도성을 지닌 만남을 향하여 나아가는 의사소통자가 되라고 부름받았습니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피상적이고 덧없는 만남이 아니라 의미 있고 지속적인 만남을 추구할 수 있습니다. 참으로, 디지털 연결이 현실의 인간과의 만남을, 현실의 관계 건설을, 현실의 공동체 형성을 지향하게 함으로써 실제로 우리와 하느님의 관계를 길러나갑니다. 또한 우리와 하느님의 관계는 기도와 교회의 성사 생활을 통해서도 길러져야 합니다. 그 본질이 단순히 ‘디지털’ 영역으로만 축소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II. 인식에서 참 만남으로


가엾은 마음을 품었던 이에게서 배우기(루카 10,33 참조)


의도성을 지닌 경청자


25) 우리의 소셜 미디어 참여에 관한 성찰은 이러한 네트워크 작동 방식과 그 안에서 우리가 마주치는 기회와 도전에 대한 인식에서 시작합니다. 제1장에서 설명하였듯 온라인 소셜 네트워크에 개인주의와 자기 과시의 유혹이 내재한다고 해서, 우리가 좋든 싫든 이러한 태도에 빠지기 마련이라는 말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자비로운 눈길과 만난 제자는 다른 무엇인가를 체험하였습니다. 그러한 제자는 경청에서, 또 내 앞에 다른 이가 있다는 인식에서 좋은 소통이 시작된다는 사실을 압니다. 경청과 인식은 만남을 증진하고 또한 무관심이라는 걸림돌은 물론 기존의 걸림돌들을 극복하려는 목표를 지닙니다. 이러한 경청은 다른 이들과 관계를 맺기 위한 필수 단계입니다. 이는 소통을 위하여 없어서는 안 될 첫째 요소이며 참된 대화의 요건입니다.13)


26)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두들겨 맞고 초주검이 되어 버려진 사람은 유다인과 사마리아인이 반목하던 예수님 시대에 전혀 뜻밖의 인물에게서 도움을 받았습니다. 사실 예상되는 행동은 적대감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마리아인은 두들겨 맞은 사람을 ‘타인’으로 보지 않고 도움이 필요한 누군가로만 보았습니다. 사마리아인은 가엾은 마음을 느끼며 그와 처지를 바꾸어 생각해 보고, 자신이 만난 그 어떤 이에게 귀 기울이고 그를 동반하고자 자기 자신과 시간과 재원을 내어놓았습니다.14)


27) 이 비유는 전혀 모르던 두 이방인 사이에 깊은 의미를 띤 만남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조명하기에, 소셜 미디어에서 맺는 관계에도 영감을 줄 수 있습니다. 사마리아인은 ‘사회적 분열’을 허물었습니다. 그는 일치와 불일치의 경계를 뛰어넘습니다. 사제와 레위인은 다친 사람을 지나쳐 가 버린 반면, 여행하던 사마리아인은 그를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듭니다(루카 10,33 참조). 가엾은 마음(연민: compassion)은 다른 사람을 나의 일부로 느끼는 감정을 뜻합니다. 사마리아인은 그 사람의 이야기에 귀 기울입니다. 마음 깊이 느끼고 움직이기에 가까이 다가갑니다.


28) 루카 복음서는 두 사람 사이의 어떤 대화도 전하지 않습니다. 사마리아인이 다친 이를 발견하고서 그에게 이렇게 물었으리라고 우리는 상상할 수 있습니다. “무슨 일이 있었나요?” 그러나 한마디 말조차 없어도 사마리아인의 열린 마음과 환대의 자세를 통하여 만남이 시작됩니다. 그 최초의 몸짓이 돌봄의 표현이고, 이것이 핵심입니다. 당대의 문화적 편견에 구애받지 않고 상대방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마음을 열어 받아들이는 능력은 다친 이가 초주검으로 방치되지 않도록 막아 주었습니다.


29) 이 두 사람 사이에 이루어진 상호작용은, 디지털 세계 안으로 첫걸음을 내딛도록 우리를 재촉합니다. 우리는 우리와 다른 사람들의 가치와 존엄을 보라고 초대받습니다. 또한 우리의 안전망, 사일로, [필터] 버블 너머를 바라보라고 초대받습니다. 소셜 미디어 환경에서 이웃이 되려면 의도성이 필요합니다. 또한 이 모두가 깊이 경청하고 다른 이의 현실을 내 것으로 느끼는 역량에서 시작합니다.


관심 도둑들


30) 경청은, 우리가 단순히 정보 교환에만 전념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과 관계를 수립하게 하는 근본적인 기술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디바이스(devices)는 정보로 터져 나갈 지경입니다. 우리는 공유된 문자, 영상, 소리 게시물을 통하여 다른 이들과 접속되어 정보 네트워크에 심겨 있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소셜 미디어 플랫폼은 우리가 이러한 환경을 탐색하는 동안 하염없이 스크롤을 움직이게 합니다. 동영상과 음향이 디지털 커뮤니케이션 매체의 풍성함을 더하여 온 것은 분명하지만 매개된 우리의 상호작용은 여전히 제한적입니다. 흔히 우리는 빠르게 정보를 얻지만, 완전하고 필요한 맥락이 빠져 있습니다. 온전한 이야기를 추구하지 않으면서도 우리는 화면에 뜨는 정보에 쉽고 빠르게 반응할 수 있습니다.


31) 이와 같은 정보의 풍성함에는 많은 이점이 있습니다. 우리가 네트워크에 속할 때, 정보에 빠르고 폭넓게 접근할 수 있고 우리 관심에 맞춤으로 정보를 제공받습니다. 우리는 실용적 정보를 얻고 사회적 결속을 유지하며 재원을 찾고 지식을 심화하며 그 폭을 넓힐 수 있습니다. 정보와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접근의 용이성은 또한 우리의 공동체들에서 사회적 경제적 불의로 소외된 이들이 목소리를 내는 포용의 자리를 창출할 잠재력이 있습니다.


32) 동시에, 정보의 무한한 가용성은 몇 가지 도전도 만들어 왔습니다. 넘쳐나는 가용 정보 때문에 인지 처리 능력에 어려움을 겪을 때 우리는 정보 과부하를 경험합니다. 비슷한 맥락에서, 고도의 사회적 요청들의 구속을 받을 때에 우리는 사회적 상호작용 과부하를 경험합니다. 다양한 웹사이트와 애플리케이션, 플랫폼은 우리 인간의 인정욕을 먹잇감으로 삼도록 프로그램화되어 있으며, 사람들의 관심을 끌려고 끊임없이 경쟁하고 있습니다. 관심 자체가 지극히 가치 있는 자산이자 상품이 되어 왔습니다.


33) 이러한 환경에서 이처럼 압도적인 정보와 사회적 상호작용의 네트워크를 탐색하고자 할 때 우리 관심의 초점이 흐려집니다. 한 번에 한 가지 사안에 집중하는 대신 끊임없이 관심의 일부만 걸쳤다가 한 주제에서 다른 주제로 재빨리 넘어갑니다. 디지털 자극에 생리적으로 유인받고 있기에, 우리는 끊임없이 스크롤을 움직이면서 더 많은 콘텐츠를 원하고 업데이트가 부족하면 낙심하면서, ‘항상 접속된’ 상태로 곧바로 게시하고자 하는 유혹에 직면하게 됩니다. 디지털 문화의 중요한 인지적 도전 가운데 하나는 목적의식을 가지고 깊게 사고하는 능력의 상실입니다. 우리는 현실을 심사숙고하는 대신에 피상적으로 훑어보고 얕은 곳에만 머무릅니다.


34) 우리는 이러한 측면에 관심을 더 기울여야 합니다. 침묵이 없다면 또 천천히 깊게 목적의식을 가지고 사고할 자리가 없다면, 우리는 인지 능력만이 아니라 인간과 하느님, 이 모두와의 깊은 상호작용까지 잃을 위험이 있습니다. 신중한 경청과 관심과 진리 식별을 위한 자리가 거의 없어지고 있습니다.


광고인들에게 잘 알려진 이른바 관심, 흥미, 갈망, 행동이라는 일련의 과정은, 유혹이 인간의 마음을 뚫고 들어가 참으로 의미 있고 생명을 주는 유일한 말인 하느님의 말씀으로부터 우리의 관심을 멀어지게 하는 과정과 비슷합니다. 이런저런 방식으로 우리는 날마다 새로운 열매들을 보여 주는 그 옛날의 뱀에게 여전히 관심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그 열매들은 “먹음직하고 소담스러워 보였다. 그뿐만 아니라 그것은 슬기롭게 해 줄 것처럼 탐스러웠다”(창세 3,6). 길에 뿌려진 말씀의 씨앗처럼, 우리는 사탄이 와서 우리 안에 뿌려진 말씀을 앗아 가 버리게 만들고 있습니다(마르 4,14-15 참조).


35) 이처럼 우리가 받는 자극과 데이터의 과부하에 따라, 침묵은 소중한 양식이 됩니다. 집중과 식별을 위한 자리를 보장하기 때문입니다.15) 디지털 문화 안에서 침묵을 찾는 힘은 집중과 경청의 중요성을 높여 줍니다. 가정과 공동체만이 아니라 교육의 장과 일터에서도 디지털 디바이스(digital device)를 멀리할 필요성이 더욱 증대됩니다. 이러한 때에 ‘침묵’은 ‘디지털 디톡스’(digital detox)에 비유될 수 있으며, 단순한 물러남이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과도 다른 이들과도 더욱 깊은 관계를 맺는 길입니다.


36) 경청은 침묵에서 생겨나는 것이며 다른 이들을 돌보기 위한 토대가 됩니다. 우리는 경청함으로써 누군가를 환영하고 환대하며 그 사람에 대한 존중을 드러냅니다. 경청은 제한된 시야를 넘어 진리와 지혜와 가치를 인정할 때 우리가 취하는 겸손의 행동이기도 합니다. 경청의 마음가짐 없이 우리는 다른 이의 선물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마음의 귀로


37) 우리의 관심과 집중력을 시험하는 디지털 문화의 속도와 즉각성과 함께, 경청은 우리의 영성 생활에서 더욱 중요해집니다. 삶에 대한 관상적 접근은 시류를 거스르는 것이자 나아가 예언자적이며, 개인만이 아니라 문화 전체를 형성하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소셜 미디어에서 경청의 노력은 데이터 단위인 바이트(bytes), 아바타(avatars), ‘좋아요’로 이루어진 네트워크가 아니라 사람들로 이루어진 관계망을 향해서 나가는 근본적인 출발점입니다.16) 그리하여 우리는 재빠른 반응, 오도하는 억측, 충동적 발언에서 벗어나 대화의 기회를 창출하고 배움을 심화할 질문을 제기하며 배려와 연민을 보여 주고 우리가 만나는 이들의 존엄을 인정하는 데로 나아갑니다.


38) 디지털 문화는 다른 이들을 향한 접근성을 무수히 늘려 왔습니다. 이는 또한 더욱 많이 경청할 기회를 줍니다. 소셜 미디어에서 ‘경청’을 말할 때 흔히 데이터 모니터링 과정, 참여 통계, 네트워크에 나타난 사회적 행위를 마케팅 분석하려는 행동을 언급합니다. 물론 이것으로 소셜 미디어가 경청과 대화를 위한 환경이 되는 데에 충분하지 않습니다. 디지털 환경에서 의도성을 지닌 경청은 ‘마음의 귀’로 경청하라고 요구합니다. ‘마음의 귀’로 경청하는 것은 신체의 청력을 넘어섭니다. 오히려 이는 온 존재로 타인에게 마음을 열라고, 곧 “친밀함을 가능하게 하는 마음 열기”17)를 하라고 우리를 다그칩니다. 소통을 이루는 데에 근본이 되는 것은 바로 관심과 환대의 자세입니다. 이러한 지혜는 관상 기도뿐만 아니라 참다운 관계와 진실한 공동체를 추구하는 사람들에게도 적용됩니다. 다른 이들과 또 타자이신 하느님과 관계를 맺으려는 열망은 여전히 인간의 기본 욕구이며, 이는 디지털 문화 안에서 접속을 향한 열망 안에서도 뚜렷이 드러납니다.18)


39) 신앙의 거룩한 선물로 가능해진 하느님과의 내적 대화와 관계는 우리가 경청의 능력을 기르는 데에 필수입니다. 하느님 말씀 또한 내적 대화에서 근본적인 역할을 합니다. 거룩한 독서(lectio divina)처럼 성경 본문에 대한 영적 독서 실천을 통하여 기도 안에서 성경 말씀에 귀 기울이는 일은 점진적이고 신중한 관상의 체험을 도와주는 깊이 있는 교육이 될 수 있습니다.19)


40) ‘오늘의 말씀’ 또는 ‘오늘의 복음’은 그리스도인들이 구글 포털사이트에서 가장 많이 검색하는 주제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러한 디지털 환경은 거룩한 말씀과 정기적인 ‘만남’을 가질 수많은 새롭고도 쉬운 가능성을 우리에게 제공하여 왔다고 말해도 좋을 것입니다. 온라인에서도 이루어지는 살아 계신 하느님 말씀과 우리의 만남은 화면으로 정보를 보는 일로부터 이야기를 들려주는 누군가를 만나는 일로 우리의 접근법을 변화시킵니다. 우리가 화면 뒤에 있는 다른 이들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명심한다면, 경청의 훈련은 그들의 이야기를 더욱 환대하게 하고 관계 맺기를 시작할 수 있습니다.


소셜 미디어에서 우리의 현존을 식별하기


41) 신앙의 관점에서 볼 때, 무엇을 소통하고 어떻게 소통하는가는 실제적 문제만이 아니라 영성적 문제이기도 합니다. 소셜 미디어 플랫폼에서 현존하는 일은 식별을 촉구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좋은 소통은 신중함의 훈련이며, 다른 이들과 관계 맺는 법을 기도 안에서 숙고할 것을 요청합니다. 이 문제에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하고 질문한 율법 교사의 눈을 통한 접근은 소셜 미디어 플랫폼에서 타인과 관계 맺는 방식에서 그리고 그 방식을 통하여 하느님 현존을 식별하도록 요청합니다.


42) 소셜 미디어에서 이웃 맺기는 복합적인 개념입니다. 소셜 미디어 ‘이웃들’은 우리가 접속을 유지하는 이들이 틀림없습니다. 동시에, 우리의 그 이웃들은 플랫폼의 방해로 또는 단순히 그들이 거기에 없어서 때로는 볼 수 없는 누군가이기도 합니다. 디지털 환경은 ‘인터넷 봇’(Internet bot)이나 ‘딥페이크’(Deepfake) 등 또 다른 참여자와도 공유하는데, 이들은 흔히 인간의 행동을 모방하거나 자료를 수집하면서 온라인에서 맡은 임무를 수행하는 자동화된 컴퓨터 프로그램입니다.


게다가, 대개 플랫폼의 작동 방식을 개발하고 관리하며 변화를 촉진하는 영리 단체인 외부 ‘권위’가 소셜 미디어 플랫폼을 통제합니다. 넓은 의미로, 이 모든 것이 온라인 ‘이웃 관계’ 안에서 ‘살아가거나’ 그에 기여합니다.


43) 우리의 디지털 이웃을 인정하는 일은 모든 이의 삶이, 심지어 그 존재 (또는 부재)가 디지털 수단으로 매개되는 것일지라도 우리와 관계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일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찬미받으소서」에서 말씀하셨듯이, “오늘날 매체는 우리 서로가 의사소통을 하며 지식과 감정을 서로 나눌 수 있게 합니다. 그러나 때로는 그 매체가 다른 사람들의 고통, 두려움, 기쁨, 복잡한 개인적 체험을 직접 접하지 못하게 합니다.”20) 소셜 미디어에서 이웃이 된다는 것은 다른 이들의 이야기에, 특히 고통받는 이들의 이야기에 함께한다는 뜻입니다. 곧, 더 나은 디지털 환경을 증진하는 일은 많은 사람이 경험하는 구체적인 문제들, 예를 들어 기아, 빈곤, 강제 이주, 전쟁, 질병, 고독 등에 관심 두지 않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오늘날 디지털 영역을 포함하는 인간 삶에 대한 통합적 관점을 증진한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소셜 미디어는 이러한 현실에 더욱 관심을 기울이게 하여 가깝거나 멀리 있는 이들 사이에 연대를 이루는 하나의 길이 될 수 있습니다.


44) 소셜 미디어를 접속만이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관계를 위한 공간으로 볼 때, 소셜 미디어상의 우리 존재에 관한 올바른 ‘양심 성찰’에는 세 가지 핵심적 관계들, 곧 하느님과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 주변 환경과의 관계가 들어 있어야 합니다.21) 우리가 다른 이들과 그리고 환경과 맺는 관계는 우리와 하느님의 관계를 자라게 하여야 합니다. 또한 가장 중요한 관계인 우리와 하느님의 관계는 다른 이들과의 관계 그리고 환경과의 관계에서 뚜렷하게 드러나야 합니다.


III. 만남에서 공동체로


“그를 돌보아 주십시오”(루카 10,35 참조): 치유의 과정을 다른 사람에게로 확장합니다.


얼굴을 마주하기


45) 커뮤니케이션은 접속으로 시작하여 관계, 공동체, 친교를 향하여 나아갑니다.22) 만남의 진실성 없이 소통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소통한다는 것은 관계를 구축한다는 것이자 ‘함께한다’는 의미입니다. 공동체가 된다는 것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과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한 근본적인 진실을 다른 이들과 나누는 것입니다. 지리·영토적 또는 민족·문화적인 단순한 근접성을 훨씬 넘어서 공동체를 구성한다는 것은 사회생활의 다양한 영역에서 소속감, 상호성 그리고 연대감과 더불어 진리를 공유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요소들을 고려할 때 커뮤니케이션 실행을 통하여 공동체의 일치를 이룩하려면, 시간과 공간을 가로질러 사회적 유대를 유지하는 것은 진리 자체를 고수하는 것에 비하여 언제나 부차적이어야 한다는 점을 상기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46) 물리적으로 가까이 있지 않은 이들 사이에서도 커뮤니케이션 실행을 통하여 공동체를 건설하는 방법에 대한 물음은 사실 아주 오래된 질문입니다. 우리는 이미 사도들의 편지에서 매개된 현존과 직접 현존하고 싶은 열망 사이의 긴장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요한 복음사가는 그의 둘째 서간과 셋째 서간에서 이렇게 말하며 끝을 맺습니다. “내가 그대들에게 쓸 말은 많지만 종이와 먹으로 쓰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보다는 내가 그대들에게 가서 얼굴을 마주하고 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의 기쁨이 충만해질 것입니다”(2요한 1,12). 바오로 사도도 이와 마찬가지로 자신이 없을 때조차도 “간절한 열망으로” 사람들을 직접 “보려고”(1테살 2,17) 편지를 통하여 자신이 세운 모든 공동체의 삶에 함께 있었습니다(1코린 5,3 참조). 그의 편지는 또한 다양한 공동체를 ‘서로 연결하는’ 역할도 하였습니다(콜로 4,15-16 참조). 공동체를 건설하는 바오로 사도의 능력은 그의 수많은 편지를 통하여 우리 시대에 전해져 왔고, 우리는 이 편지들에서 그의 물리적인 현존과 그가 공동체에 써 보낸 말을 통한 현존 사이에 이분법이 없었다는 것을 배웁니다.


47) 온라이프 시대가 가속화되는 오늘날 세상의 현실에서 이분법적인 논리(디지털 대 물리적인 실제 대면)로 인간관계를 생각하는 ‘양자택일’의 논리를 극복하고, 인간 생명과 사회생활의 상호보완성과 총체성에 기반을 둔 ‘둘 다 모두’라는 논리를 가져야 합니다. 소셜 미디어 네트워크에 기반한 커뮤니티 관계들은 지역 공동체들을 강화하여야 하고 그 반대로도 마찬가지여야 합니다. “소셜 웹의 이용이 몸과 마음, 눈과 눈길과 숨결을 통하여 살아 있는 살과 뼈로 이루어진 만남을 보완할 뿐이라는 사실을 일깨워 줍니다. 통신망이 그런 만남의 연장이나 기대로 이용될 때, 통신망은 그 틀에서 벗어나지 않고 늘 친교의 자원이 됩니다.” 우리가 화면 저편에 ‘숫자들’이나 단순한 ‘개인의 집합체’가 아니라 이야기, 꿈, 기대, 고통을 지닌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기억한다면, “디지털 세상은 인간미 넘치는 환경이 될 수 있습니다. 디지털 세상은 단순히 전선으로 연결된 망이 아니라 사람들의 관계망입니다.” 화면 저편에 이름과 얼굴이 있습니다.


예리코로 가는 길에


48) 디지털 미디어는 공간과 문화의 경계를 넘어 사람들을 만날 수 있게 합니다. 이 디지털 만남은 물리적인 친밀감을 반드시 가져오지는 않지만, 그렇더라도 의미 있으며 영향력이 강하고 현실적일 수 있습니다. 이러한 만남은 단순한 접속을 넘어 상대방과 진실하게 관계를 맺으며 의미 있는 대화를 나누고 연대를 표하며 누군가의 고립과 고통을 덜어주는 통로가 될 수 있습니다.


49) 소셜 미디어는 또 다른 “예리코로 가는 길”로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길가에서 큰 소리로 부르짖던 눈먼 이(루카 18,35-43 참조), 돌무화과나무 가지에 숨어 있던 부정직한 세관장(루카 19,1-9 참조), 강도가 초주검으로 만들어 놓고 가버린 다친 이(루카 10,30 참조)와 만나셨던 것처럼 계획되지 않은 만남의 기회로 가득 차 있는 길입니다. 동시에,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종교적인’ 사람(사제나 레위인) 또는 예수님을 따른다고 주장하는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들이 도움을 주거나 치유와 화해를 추구할 것이라는 보증이 없다는 사실을 상기하게 합니다. 눈먼 사람은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질책받으며 잠자코 있으라는 말을 들었고, 자캐오는 예수님과의 상호작용으로 다른 이들의 투덜거림을 가져오게 되었고, 상처 입은 이는 그의 곁을 사제와 레위인이 그냥 지나감으로써 외면당하였습니다.


50) 얼굴을 마주 보는 만남에서와 마찬가지로 디지털 교차로에서도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소셜 미디어에서 종교적 콘텐츠를 선포하는 많은 프로필이나 계정을 찾을 수는 있지만 그것들이 신앙인의 방식으로 관계적 역동에 관여하지는 않고 있습니다. 특히 그리스도교 컨텐츠를 공유하는 맥락 안에서 적대적인 상호작용과 폭력적이며 비하하는 말들을 화면을 통하여 부르짖고 있는데, 이것들은 복음 자체와 모순입니다.25)


반대로, 다친 이와의 만남에 관심을 기울이고 마음을 여는 착한 사마리아인은 연민의 마음으로 행동하고 그를 보살핍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은 희생자의 상처를 치료하고 지속적으로 돌보고자 그를 여관으로 데리고 갑니다. 이처럼 소셜 미디어를 더 인간적이면서 관계의 장으로 만들려는 우리의 바람도 구체적인 태도와 창의적인 몸짓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51) 공동체 의식을 촉진한다는 것은, 디지털 공간에서 그것들을 통하여 그리고 그 자체로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가 될 수 있는 공유된 가치, 경험, 희망, 슬픔, 기쁨, 유머 그리고 농담까지도 관심을 기울이는 것을 포함합니다. 경청, 식별, 만남과 같이 다른 이들과 공동체를 형성하고자 한다면 개인적인 헌신이 필요합니다. 소셜 미디어 플랫폼에서 ‘우정’으로 정의되는 것은 연결 또는 익숙함에서 단순하게 시작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도 지지와 동료애의 나눔 정신을 강조할 수 있습니다. 공동체가 되고자 한다면 자유롭고 상호적인 참여 의식이 필요합니다. 이는 근접성을 기반으로 구성원들을 모으는 바람직한 단체가 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자유와 상호 지지는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공동체를 형성하려면 치유와 화해의 작업이 때로는 그 길을 이루는데 첫 번째 단계이기도 합니다.


52) 소셜 미디어조차도, “우리는 착한 사마리아인이 될지 아니면 멀찍이 지나쳐 가는 무심한 행인이 될지 선택해야 합니다. 시야를 넓혀 우리는 역사와 세계를 전체적으로 바라본다면, 우리는 모두 이 비유의 등장 인물과 같았거나 또는 같습니다. 우리 모두는 다친 사람, 강도들, 멀찍이 지나가는 사람들, 착한 사마리아인이 지닌 무엇인가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단순히 ‘접속된’ 디지털 ‘고속도로’를 지나쳐 갈 수도 있고27) 사마리아인과 같이 무엇인가를 하여 접속이 참된 만남을 수반하도록 할 수도 있습니다. 우연히 지나가던 행인이 다친 이의 상처를 치유하며 돌볼 때에 이웃이 됩니다. 그는 다친 이를 돌보면서 육체적인 상처뿐 아니라 사회 집단들 사이에 존재하는 분열과 적대감까지도 치유하는 것을 목표로 삼습니다.26)


53) 그렇다면 소셜 미디어에서 상처를 ‘치유’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우리는 분열을 어떻게 ‘싸맬’ 수 있을까요? 우리는 오늘날 문화들의 ‘지리적 실존적 변두리’를 환대하고 통합할 수 있는 교회 환경을 어떻게 구축할 수 있을까요? 이러한 질문들은 디지털 고속도로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존재를 식별하는 데 필수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우리가 형제자매라는 것을 표현하고, 증오와 분노를 조장하는 대신 다른 이들의 역경의 아픔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는 또 다른 착한 사마리아인이 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있습니다. 비유에 나오는 우연히 지나가던 그 사마리아인 행인처럼, 쓰러진 사람을 받아들이고 통합하고 다시 일으켜 세우고자 꾸준히 지치지 않고 노력하는 민족과 공동체가 되려는 자발적이고 순수하고 단순한 바람만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28)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54) 관계는 관계를 부르고, 공동체는 공동체를 건설합니다. 두 민족 사이에 맺어지는 관계의 은총은 그들의 상호작용을 넘어섭니다. 인간은 관계와 공동체를 위하여 만들어졌습니다. 동시에, 코로나19의 세계적 유행 기간에 우리가 심각하게 경험하였듯이 외로움과 고립은 우리의 문화적 현실을 고통스럽게 합니다. 동반자를 찾는 이, 특히 소외된 이들은 공동체, 포용 그리고 다른 이들과의 연대를 모색하고자 자주 디지털 공간으로 눈을 돌립니다. 많은 이들이 디지털 공간에서 다른 이들과 접속하면서 위안을 찾았지만, 어떤 이들은 이러한 위안을 부적절하다고 여깁니다. 우리는 비판적이거나 방어적인 태도들을 겪지 않으면서 대화에 참여하고 지지를 얻으려는 이들을 위한 공간을 제공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55) 만남에서 관계로 그리고 공동체로 나아감은 디지털 문화의 선물과 도전 모두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때때로 온라인 공동체는, 사람들이 이념적 공공의 적, 곧 외부의 ‘타인’에게 맞서 의견을 모으려는 공통점을 찾을 때 형성됩니다. 이러한 종류의 양극화은 ‘디지털 부족주의’를 낳고 그 안에서 단체들이 적대적인 정신으로 다른 단체들과 대립합니다. 우리는 형제자매인 다른 이들, 곧 이러한 부족의 경계를 넘어 존엄한 사람들의 존재를 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누가 나의 이웃이고 누가 나의 이웃이 아닌지 정하려고 다른 사람들을 분류하여서는 안 됩니다. 이웃이 되고 안 되고는 나에게 달려 있습니다. 그 결정은 나의 몫입니다. 곧, 낯선 사람이거나 적대적일지라도 내가 만나는 이들,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 이웃이 될지 말지에 대한 결정은 나에게 달려 있습니다.”29) 안타깝게도 깨져버린 관계, 갈등, 분열이 교회에 낯설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스스로 ‘가톨릭’이라고 소개하는 단체가 분열을 조장하고자 소셜 미디어를 사용할 때 그들은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마땅히 하여야 하는 행동을 따르지 않는 것입니다.30) 분쟁과 적대적인 낚시성 링크를 이용하는 대신에 거부하는 태도가 회심의 기회, 겉으로 보기에 분열을 초래하는 문제에 대하여 만남과 대화와 화해를 증언하는 기회가 되어야 합니다.31)


56) 소셜 미디어 참여는 개인의 의견을 교환하거나 행동을 대신하는 수준을 넘어서야 합니다. 소셜 미디어를 통하여 움직여지는 사회적 행동은 생각들의 피상적인 논쟁보다 더욱 커다란 영향을 미쳐왔고 때로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데 더욱더 효과적입니다. 이러한 논쟁들은 일반적으로 허용되는 문자들의 수와 사람들이 댓글로 반응하는 속도에 따라 제한되고 감정적인 인신공격적인 주장들은 말할 것도 없이, 논의되는 전체적인 주제와 무관하게 말하는 이를 향하여 공격합니다.


생각을 공유하는 것이 필요하지만, 생각만으로는 작용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생각들은 ‘육체’(flesh)가 되어야 합니다. 행동은 날마다 토양을 비옥하게 하여야 합니다.32)


사마리아인에게 배우면서 우리는 이러한 역학에 주의를 기울이도록 부름받았습니다. 사마리아인은 연민을 느끼는 데에서 멈추지 않았고, 낯선 이의 상처에 붕대를 감는 데서 끝낸 것조차 아닙니다. 한발 더 나아가 상처 입은 낯선 이를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그가 지속적인 돌봄을 받을 수 있도록 준비합니다.33) 이러한 준비는 사마리아인과 다친 이 사이에 형성된 돌봄의 관계와 공동체의 씨앗이 여관 주인과 그의 식솔에게까지 확장됩니다.


율법 교사들과 같이 우리 또한 디지털 미디어 안에 우리의 현존으로 공동선을 증진하도록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라고 초대받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유해한 디지털 환경을 치유하도록 도울 수 있을까요? 우리가 어떻게 치유와 화해를 위한 환대와 기회를 증진할 수 있을까요?


57) 환대는 다른 이와 만나게 하는 개방성에 기반을 두기에 이러한 환대를 통하여 우리는 낯선 이의 모습을 취하신 그리스도를 맞이합니다(마태 25,40 참조). 이를 위하여 디지털 공동체는 콘텐츠와 관심사를 공유하여야 할 뿐만 아니라 함께 행동하고 친교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디지털 맥락 안에 이미 강력한 돌봄 공동체의 모습이 존재합니다. 예를 들어, 질병, 상실, 애도의 시기에 다른 이들을 지원하고자 모이는 공동체와,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위하여 크라우드펀딩(crowdfunding)으로 모금하는 공동체와 소속 구성원들 사이에서 사회적·심리적 지원을 제공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모든 노력은 ‘디지털 친밀함’의 예로 고려될 수 있습니다. 서로 매우 다른 사람들이 온라인으로 ‘사회 행동의 대화’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신앙으로 영감을 받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서든지, 다른 이들의 선을 위하여 행동하고자 구성된 공동체는 소셜 미디어에서 고립을 극복할 수 있는 열쇠입니다.


58) 우리는 한층 더 크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곧, 소셜 웹은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소셜 웹을 바꿀 수 있습니다. 우리가 신뢰, 투명성, 평등, 포용에 기반을 둔 새로운 모델을 상상하면서 변화의 주체(driver)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함께 미디어 기업들이 그들의 역할을 다시 되돌아보고 인터넷을 참으로 공공의 장으로 만들도록 촉구할 수 있습니다. 잘 구성된 공공의 공간은 더 나은 사회 행동을 증진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디지털 공간이 더 인간적이며 더 건강한 환경이 되도록 새롭게 건설하여야 합니다.


함께 식사하기


59) 신앙의 공동체로서 교회는 하느님 나라를 향한 순례길에 있습니다. 소셜 미디어와, 더 넓게는 디지털 현실이 이 여정의 중대한 측면이기 때문에, 디지털 환경에서 교회의 현존과 관련하여 친교와 공동체의 역동을 성찰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세계적 유행으로 가장 심각했던 봉쇄 기간에 소셜 미디어와 또 다른 커뮤니케이션 수단을 통한 전례 거행 방송은 직접 참여할 수 없는 이들에게 어느 정도의 위안을 제공하였습니다. 하지만 성사 생활을 보완하는 방식으로 디지털 환경을 활용하는 방법에 관하여 우리 신앙 공동체들 안에서 성찰하여야 할 사안들은 여전히 많습니다. 예를 들어 미사 재방송의 상업적 이용 등과 같은 다양한 주제에 관하여 신학적이고 사목적 질문들이 제기되었습니다.


60) 교회 공동체는 출신, 거주지 또는 지리적 소속과 관계없이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서 형성됩니다(마태 18,20 참조). 우리는 미사 방송을 통하여 교회가 사람들의 집으로 들어갔다고 인정할 수는 있지만, 성찬례에 ‘참여’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성찰할 필요가 있습니다.34) 디지털 문화의 출현과 세계적 유행의 경험은 우리의 사목 계획이 “가정 교회”, 곧 집과 식탁 주변에 모이는 교회에 얼마나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는지를 보여 주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우리 교회에서 거행하는 전례와 가정에서 몸짓, 말 그리고 기도로 주님을 기리는 행위 사이의 연결고리를 새롭게 발견하여야 합니다. 다르게 표현하면, 우리는, 성체를 받아 모심으로써 영적으로 양육되고 신자로서 친교 안에서 확인되는 곳인 제대와 우리 가족의 식탁 사이를 잇는 다리를 다시 세워야 합니다.


61) 화면을 통하여 함께 식사할 수 없습니다.35) 우리가 함께 식사할 때 우리의 모든 감각, 곧 맛과 냄새 그리고 식탁에서 나누는 대화를 들으면서 식사하는 이의 얼굴을 응시하는 시선 등이 관여합니다. 식탁에서 함께 식사한다는 것은 상대방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첫 번째 교육입니다. 이는 가족 구성원, 이웃, 친구 그리고 동료 사이에 관계를 강화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마음, 정신 그리고 몸과 관련된 전인적 인간으로 제대에 참여합니다. 이 전례는 감각적 경험입니다. 이에 우리는 아름다움, 의미, 조화, 전망, 상호작용 그리고 정서에 대한 욕구가 일깨워지고 충족되는 감각의 문을 통하여 성체성사의 신비로 들어갑니다. 무엇보다도 성체성사는, 우리가 그저 ‘시청’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참으로 우리를 양육하는 것입니다.


62) 육화는 그리스도인에게 중요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육신을 취하시어 사람이 되셨고, 고통을 겪으시며 육신과 함께 돌아가셨고, 육신으로 부활하시어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분께서 하느님 아버지께로 돌아가신 다음에 몸으로 겪은 그분의 모든 것이 성사 안으로 흘러 들어갔습니다.36) 그분께서는 천상의 지성소에 들어가셔서 순례의 길을 열어 놓으셨으며, 이 길을 통하여 하늘 나라가 우리 위에 부어집니다.


63) 공간의 경계를 넘어 접속된다는 것이 ‘놀라운 기술적 발견’의 성과가 아닙니다. 이는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일” 때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의 보편적 친교에 참여할 때마다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경험한 것입니다. 그곳에서 우리는 천상 예루살렘과 ‘접속’되고 모든 시대의 성인들과 만나며 그리스도의 한 몸을 이루는 지체로서 서로를 알아봅니다.


그러므로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2019년 홍보 주일 담화에서 상기하셨듯이, 소셜 웹은 다른 이의 몸, 마음, 눈, 시선 그리고 숨결을 통하여 살아나는 육신의 만남을 보완하지만 이를 대체하지는 않습니다. “한 가족이 통신망을 활용하여 더욱 친밀해지고 식탁에 마주 앉아 서로의 눈을 바라볼 때, 통신망은 친교의 자원이 됩니다. 교회 공동체가 네트워크를 통해 활동을 계획하고 성찬례를 함께 거행할 때, 네트워크는 친교의 자원이 됩니다...... 교회는 그 자체로 성찬 친교로 엮어진 네트워크입니다. 성찬 친교에서는 ‘좋아요’가 아니라 진리, ‘아멘’을 바탕으로 일치가 이루어집니다. ‘아멘’으로,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몸에 일치하고 다른 이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37)


구별되는 방식

사랑하여라......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루카 10,27-28 참조).


‘무엇을’ 그리고 ‘어떻게’: 사랑의 창조력


64) 많은 그리스도교 콘텐츠 제작자는 자기 자신에게 다음과 같이 묻습니다. “더 많은 사용자-사람-영혼에 도달하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전략은 무엇일까? 나의 콘텐츠를 더욱 매력적으로 만드는 도구는 무엇일까? 가장 적합한 방식은 무엇일까?” 이러한 질문들이 도움은 되지만, 커뮤니케이션은 단순히 ‘전략’이 아니라는 사실을 언제나 기억해야 합니다. 그보다 훨씬 더 큰 의미를 지닙니다. 진정한 의사소통자는 모든 것을 내어 주고 자기 자신을 온전히 바칩니다. 우리는 우리의 영혼과 몸, 우리의 정신과 마음과 손 그리고 모든 것으로 소통합니다.38)


생명의 빵을 나눔으로써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고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바치신 분(갈라 2,20 참조)에게 ‘나누는 방식’을 배웁니다. 이 방식은,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하느님 방식의 독특한 특징으로 인정하신 세 가지 태도, 곧 ‘친밀함, 연민, 온유한 사랑’에 반영됩니다.39) 예수님께서는 친히 고별 만찬에서 당신께서 제자들을 사랑하신 것처럼 서로 사랑하는 것이 당신 제자들의 구별되는 표지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이로써 모든 이가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알아볼 수 있습니다(요한 13, 34-35 참조).


소셜 미디어에서 하느님의 ‘방식’을 어떻게 반영할 수 있을까요?


65) 무엇보다도 게시물, 댓글, ‘좋아요’를 통하여, 말이나 글, 영화나 동영상 이미지를 통하여 우리가 공유하는 모든 것은, 말씀만이 아니라 삶의 모든 방식으로 당신의 메시지를 전하신 그리스도에게서 배운 방식과 일치하여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아울러 우리는 가장 심오한 수준의 소통이란 사랑으로 자신을 내어 주는 것임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40) 그러므로 우리가 무엇을 말하는지만큼 무엇을 어떻게 말하는지도 매우 중요합니다. 모든 창조력은 어떻게가 무엇과 일치하도록 보장하는 데 있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사랑을 잘하여야”만 소통을 잘할 수 있습니다.41)


66) 진리를 전하려면 우리는 먼저 참된 정보를 전달하고 있는지 확인하여야 합니다. 이는 콘텐츠를 만들 때뿐만 아니라 콘텐츠를 공유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신뢰할 수 있는 출처인지 확인하여야 합니다. 선을 전하려면 우리는 양질의 콘텐츠, 곧 해를 끼치지 않고 도움을 주는 메시지가 필요합니다. 이는 쓸데없는 토론에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긍정적인 행동을 증진합니다. 아름다움을 전하려면 우리는 메시지를 완전하게 전달하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하여 관상의 기술이 필요합니다. 이는 하나의 현실 또는 사건을 다른 많은 현실과 사건들과 연결하여 볼 수 있게 하는 기술입니다.


‘탈진실’과 ‘가짜 뉴스’의 상황에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요한 14,6)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과의 친교와 서로 함께 이루는 친교의 원칙을 보여 주십니다.42)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2019년 홍보 주일 담화에서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상기시키셨습니다. “진실을 지켜야 하는 의무는, 친교의 상호 관계를 거짓 없이 드러내어야 할 필요성에서 생겨납니다. 실제로 진실은 친교 안에서 드러납니다. 한편, 거짓은 우리가 한 몸의 지체임을 이기적으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것입니다. 거짓은 타인에게 자신을 내어 주기를 거부하는 것이며, 따라서 자기 자신을 발견할 유일한 방법을 잃어버리게 됩니다.”43)


67) 이러한 까닭에, 두 번째로 기억하여야 할 점은 메시지를 전달하는 이가 공동체에 속하여 있을 때 해당 메시지가 더 수월하게 설득력을 갖는다는 것입니다. 개별적인 행동뿐 아니라 공동체로서의 행동 또한 시급합니다. 소셜 미디어가 콘텐츠 제작에서 개인의 주도권을 촉진한다는 사실이 소중한 기회처럼 보일 수 있지만, 개별적인 활동은 기분에 따라 수행되고 교회 공동체의 전반적인 목표와 전망을 반영하지 않을 때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재능과 약점을 지닌 우리가 저마다 한 단체의 일원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고자 우리의 안건과 능력과 기술에 대한 주장을 내려놓는 것은 “서로가 서로에게 속한 이들”로서 협력할 수 있도록 힘을 실어주는 선물입니다. 우리는 서로에 대한 소속감을 길러주고, 바오로 성인께서 몸의 지체들이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게 하는 “관절”이라고 부른 것을 되살리는 소통 방식을 증언하도록 부름받았습니다(콜로 2,19).


68) 그러므로 우리의 창조력은 오직 친교의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위대한 개인의 천재적 재능으로 얻는 성취가 아니라 오히려 위대한 우정의 결실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이는 사랑의 결실입니다. 그리스도인 의사소통자로서 우리는 개인이 아니라 공동체 건설과 소속 방식에 기반하는 소통 형태의 증인이 되도록 부름받았습니다. 콘텐츠를 전달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 콘텐츠를 사랑하는 이들의 목소리를 한데 모으는 것입니다. 팀으로 함께 일하는 것, 곧 다양한 재능과 배경과 능력 그리고 리듬을 위한 공간을 만들며 ‘교향곡의 창조력’ 안에서 아름다움을 공동 창조한다는 것은 실제로 우리가 하느님의 참된 자녀라는 가장 아름다운 증거입니다. 하느님의 자녀인 우리는 자신에게만 관심을 두던 데에서 속량 되어 다른 이들과의 만남에 열려 있습니다.


이야기로 전하기


69) 좋은 이야기는 주의를 사로잡고 상상력을 자극합니다. 이러한 이야기는 진실을 밝히고 이를 받아들이게 합니다. 이야기들은 세상을 이해하고 가장 심오한 질문들에 답할 수 있는 해석의 틀을 우리에게 줍니다. 이야기는 공동체를 건설하는데, 이는 공동체가 언제나 소통을 통하여 건설되기 때문입니다.


스토리텔링은 우리의 관심을 끌고 우리에게 직접 말하는 이야기의 독특한 힘 때문에 디지털 문화에서 새로운 중요성을 얻게 되었습니다. 또한 이야기들은 토막 게시물이나 트윗에서보다 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더 풍부한 맥락을 제공합니다. 디지털 문화는 정보로 가득하고, 그 플랫폼은 거의 무질서한 환경입니다. 이야기들은 구조, 곧 디지털 체험을 이해하는 방식을 제공합니다. 디지털 플랫폼에서 흔히 접하는 단순한 논쟁보다 더 ‘살을 갖추고’이고, 피상적이고 감정적인 반응보다 더 복합적인 이 이야기들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전하거나 자신을 변화시킨 이야기를 공유하는 기회를 줌으로써 인간관계를 회복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70) 이야기로 전하는 것이 좋은 이유는 우리의 메시지나 사명에 의문을 제기하는 이들에게 응답하기 위해서입니다. 반대 담론을 만드는 것이 증오의 댓글에 대응하는데 논쟁으로 반박하는 것보다 더욱 효과적일 수 있습니다.44) 이런 방법으로 우리는 예수님께서 착한 사마리아인 비유에서 하셨던 것처럼 방어적인 태도에서 긍정적인 메시지의 적극적인 홍보와 연대의 함양으로 관심을 돌립니다. 우리가 누구를 이웃으로 여겨야 하고 누구를 무시하거나 심지어 미워할 수 있는지 율법 교사와 논쟁하는 대신에 예수님께서는 단순히 하나의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뛰어난 이야기꾼으로서 예수님께서는 율법 교사를 사마리아인의 자리가 아니라 다친 이의 자리에 두셨습니다. 다친 이의 이웃이 누구인지 알아내려면 먼저 다친 이의 입장에 서고 자신에게 연민을 가졌던 또 다른 이를 이해하여야 합니다. 율법 교사가 이를 알아차리고 다친 이를 위한 사마리아인의 보살핌을 경험하게 되었을 때 비로소 그는 자기 삶에 대한 결론을 내리고 이 이야기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이 율법 교사 자신은 강도의 손에 넘겨진 이이고, 그에게 다가간 사마리아인은 바로 예수님입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있는 우리 각자는 바로 그곳에 누워 있는 다친 이입니다. 그리고 우리 각자에게 사마리아인은 예수님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라고 묻고 있다면 이는 우리가 사랑받고 있다는 것, 우리의 삶이 모든 삶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아직 경험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71) 교회 초기부터,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이 그분의 현존 안에서 겪은 심오한 경험을 이야기하면서 다른 이들을 예수님의 제자가 되도록 이끌었습니다. 사도행전은 그러한 예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예를 들어 베드로는 성령에 힘입어 오순절 순례자들에게 그리스도의 부활에 관하여 설교합니다. 이 설교는 삼천 명의 사람을 회개로 이끌었습니다(사도 2,14-41 참조). 여기서 우리는, 우리가 이야기로 전하는 것이 다른 이들에게 얼마나 많은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알게 됩니다. 그와 동시에, 이야기와 경험담을 전하는 것은 복음화의 한 요소에 불과합니다. 신앙 고백문과 다른 교리 자료들을 통한 신앙의 체계적인 설명 또한 중요합니다.


분열된 세상에 공동체 건설하기


72) 사람들은 방향을 제시하며 희망을 줄 수 있는 누군가를 찾습니다. 그들은 도덕적이고 영적인 지도력을 갈망하지만 때로는 전통적인 교회 조직 안에서 이를 발견하지 못합니다. 이제 ‘인플루언서’, 곧 많은 팔로워를 얻고 유지하는 사람, 더 많이 눈에 띄며 자기 생각이나 경험으로 다른 이들에게 영감을 주고 동기를 부여할 수 있는 개인에게 의지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소셜 미디어 마케팅 접근을 위한 여론 형성 이론에 따르면, 소셜 미디어 인플루언서의 성과는 방대한 네트워크에서 수많은 팔로워를 끌어들임으로써 돋보이는 그들의 능력과 관련이 있습니다.


73) ‘바이럴’(viral, 역주: 입소문) 현상 자체는 중립적 행위이므로 다른 이들의 삶에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영향을 바로 미치지 않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소셜 네트워크는 인간관계를 용이하게 하고 사회의 선을 증진시킬 수 있지만, 개인들과 집단들의 양극화와 분열을 더욱 악화시킬 수도 있습니다. 디지털 세계는 열린 광장으로 사람들이 만나 서로에게 힘을 주거나 상처를 입힐 수 있으며, 유익한 토론을 하거나 중상모략이 이루어지기도 하는 자리인 것입니다.”45)


74) 마이크로(micro) 그리고 매크로(macro) 인플루언서


우리는 모두 우리의 ‘영향력’(influence)을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대규모의 청중을 둔 매크로 인플루언서뿐만 아니라 마이크로 인플루언서도 있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마이크로 인플루언서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팔로워의 수와는 관계없이 각자의 잠재적 영향력을 인식하여야 합니다. 동시에 모든 그리스도인이 ‘인플루언서’로서 전달하는 메시지의 가치는 그 메시지 전달자의 자질에 달려 있지 않다는 사실을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모든 팔로워는 아무리 좁은 범위의 관계에서조차도 자신과 관계가 아니라 하느님 나라와의 연결고리를 만들 수 있는 잠재력이 있습니다. “주 예수님을 믿으시오. 그러면 그대와 그대의 집안이 구원을 받을 것이오”(사도 16,31).


그런데 팔로워의 수가 늘어남에 따라 우리의 책임이 커진다는 것을 인식하여야 합니다. 팔로워 수가 많을수록 우리는 독자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더욱 인지하여야 합니다. 자신의 공동체, 특히 공직자들을 위한 사목 책임은 디지털 미디어의 대중적 발언대에서 개인의 의견을 펼치도록 독려하는 것보다 부차적일 수 없습니다.46)


75) 반응이 아니라 성찰하기


그리스도교 방식은 소셜 미디어에서 반응하는 모습이 아니라 성찰하는 모습이어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모두 사용자들 사이에 분노나 감정적 반발을 일으키어 갈등을 조장하고자 의도적으로 고안된 콘텐츠 안에 감추어진 디지털 함정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하여야 합니다.


오해를 불러일으키며 분열을 악화시키고 갈등을 조장하며 편견이 깊어지게 할 수 있는 콘텐츠를 게시하고 공유하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안타깝게도, 온라인 상호작용에서 격하고 때로는 무례한 논쟁에 휩쓸리는 경향은 흔하게 일어납니다. 우리는 소셜 미디어에서 공개적으로 비난하고 교회 공동체에서 분열을 일으키거나, 첫 번째 제자들이 하였던 것처럼 우리 가운데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루카 9,46) 하는 문제로 논쟁함으로써 우리 형제자매의 ‘눈 속에 있는 티’(마태 7,3)를 찾으려는 유혹에 빠질 수 있습니다. 논쟁의 여지가 있고 피상적인 소통, 그리하여 분열을 일으키는 소통의 문제가 교회의 지도력, 곧 주교, 신부 그리고 중요한 평신도 지도자들에게서 비롯될 때 특히 걱정스럽습니다. 이는 공동체에 분열을 일으킬 뿐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도 이와 같은 유형의 소통을 조장하도록 승인하고 정당성을 부여합니다.


이러한 유혹에 직면하였을 때, 반응하지 않거나 이 잘못된 역동에 힘을 실어주지 않고자 침묵으로 반응하는 것이 때로는 가장 좋은 조치입니다. 이러한 유형의 역동은 건설적이지 않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며 오히려 심각한 해를 끼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다른 방식을 보여 주도록 부름받았습니다.


76) 적극적으로 행동하고 시노달리타스 살기


소셜 미디어는 우리와 물리적으로 멀리 있는 미덕이나 아픔에 관한 이야기와 경험을 공유하는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우리를 하나 되게 하는 것을 재발견하면서 함께 기도하고 함께 선을 추구할 수 있습니다.47) 적극적으로 행동한다는 것은 사람들의 일상생활에 영향을 미치는 프로젝트에 참여한다는 의미입니다. 이러한 프로젝트는 인간의 존엄성과 발전을 촉진하고 디지털 불평등을 줄이는 것이 목표이며 정보와 문해력에 대한 디지털 접근을 장려합니다. 또한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위한 자금 관리와 크라우드펀딩 사업을 도모하고 사회에서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이들에게 발언권을 줍니다.


우리가 직면한 도전들은 전 세계적이므로 전 세계적인 공동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개인이 아닌 공동체로서 함께 행동하는 법을 배우는 것은 시급합니다. ‘개별적인 인플루언서들’이라기 보다 ‘친교의 직공들’로서 우리의 재능과 기술을 모으고 지식과 기여를 공유하는 것입니다.48) 이러한 까닭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둘씩 짝지어”(마르 6,7) 보내심으로써 우리는 함께 걸음으로써49) 소셜 미디어에서도 교회의 시노달리타스 면모를 드러낼 수 있습니다. 이는 온 세상의 세례 받은 모든 이를 하나 되게 하는 친교의 깊은 의미입니다. 친교는 그리스도인인 우리의 ‘유전자’(DNA)의 일부입니다. 이처럼 성령께서는 우리가 다른 이에게 마음을 열고 보편적 형제애 안에 속하는 일원이라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게 하십니다.


증인의 표지


77) 우리의 소셜 미디어는 일반적으로 정보를 전파하는 데에 중점을 둡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발상, 가르침, 생각, 영적 성찰, 선호 등을 제시할 때 그리스도교 전통에 충실하여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흥미로운 종교적 콘텐츠로 다른 이들에게 다가갈 수 있는 능력에 더하여, 경청하고 행동하기 전에 식별하며 모든 이를 존중으로 대하고 판단보다는 질문과 함께 응답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또한 논쟁을 일으키기보다는 침묵을 지킬 수 있고 “듣기는 빨리 하되, 말하기는 더디 하고 분노하기도 더디”(야고 1,19) 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하는 모든 말과 행동에 증인의 표지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상품을 팔기’ 위하여 소셜 미디어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광고하는 것이 아니고 생명, 곧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생명을 전달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그리스도인은 개종시키려고 하지 말고 증거하려고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78) 증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증인에 대한 희랍어는 ‘순교자’이며, 이는 가장 강력한 ‘그리스도인 인플루언서들’ 가운데 일부가 순교자들이었음을 일컫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순교자들이 지닌 매력은 그들이 자기 목숨을 바침으로써 하느님과의 일치를 나타낸다는 것입니다.50) “여러분의 몸이 여러분 안에 계시는 성령의 성전임을 모릅니까? 그 성령을 여러분이 하느님에게서 받았고, 또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의 것이 아님을 모릅니까?”(1코린 6,19). 순교자들의 몸은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내는 훌륭한 수단입니다.


순교는 그리스도인 증거의 최고의 표징인 한편, 모든 그리스도인은 자신을 희생하도록 부름받았습니다. 곧, 그리스도인의 삶은 하느님의 아드님을 가리키는 표징인 하느님 사랑의 소통을 위한 공간이 되고자 우리 자신, 곧 영혼과 육신을 바침으로써 우리 존재 자체를 소진하는 소명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첫 증인인 위대한 세례자 요한의 말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요한 3,30). 자기 제자들에게 그리스도를 따르라고 권고하였던 앞서 파견된 이처럼 우리 또한 자신이 아닌 그리스도를 위하여 ‘팔로워들’을 찾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일치시키는 친교를 맺어야만 복음을 전파할 수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다른 이들과 교류하는 예수님의 본보기를 따름으로써 할 수 있습니다.


79) 신앙의 매력은 사람들이 지금 여기에 있는 곳에 그리고 그들이 있는 방식에 도달합니다. 나자렛 출신의 알려지지 않은 목수였던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주변 모든 지방에서 빠르게 인기를 얻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목자 없는 양과 같았던 사람들을 연민을 가지고 바라보시면서 아픈 이를 치유하시고 군중을 가르치심으로써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또한 최대한 ‘확산’을 확보하고자 때로는 산이나 배에서 큰 무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참여’를 촉진하고자 예수님께서는 당신 제자 중 열두 명을 뽑으시고 그들에게 모두 설명하셨습니다. 그런데 ‘성공’의 정점에서 예수님께서는 예고 없이 하느님 아버지와 함께하는 고독으로 물러나셨습니다. 그리고 당신 제자들에게도 이와 똑같이 하라고 요청하십니다. 제자들이 선교의 성공담을 이야기하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물러가 휴식을 취하고 기도하라고 초대하셨습니다. 또한 그들이 자신들 가운데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는 문제로 논쟁하고 있을 때 십자가 위에서 겪게 될 당신의 고난을 그들에게 알려 주셨습니다. 제자들이 나중에 이해하게 될 예수님의 목적은 당신의 청중을 늘리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이가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도록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을 드러내는 것이었습니다(요한 10,10 참조).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 우리는, 하느님 아버지와의 개인적인 대화에 충분한 공간을 할애하고 성령과 일치를 이루는 데 우선하여야 합니다. 성령께서는 언제나 우리에게 십자가 위에서 모든 것이 역전되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줍니다. 하느님의 영광이 가장 장대하게 드러난 순간에 ‘좋아요’는 전혀 없었고 ‘팔로워’도 거의 없었습니다! 모든 인간적 ‘성공’의 기준은 복음의 논리에 따라 상대화됩니다.


80) 어떤 다른 이가 한 일에 대하여 우리가 말과 삶으로 보증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증언입니다.51) 이런 의미에서, 그리고 이런 의미에서만 우리는 그리스도와 그분 성령의 증인 그리고 나아가 선교사도 될 수 있습니다. 이는 우리와 소셜 미디어와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은 무엇보다도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기쁨을 증언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 기쁨은 감사하는 기억을 배경으로 언제나 환히 빛납니다. 우리가 희망하는 이유에 관하여 다른 이들에게 말하고 온유와 존경으로 이를 행하는 것은(1베드 3,15 참조) 감사의 표시입니다. 이는 감사를 통하여 성령께 온순하여져 자유롭게 된 이의 응답입니다. 원하거나 노력하지도 않고 ‘역사 안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이 된 마리아의 경우가 그러하였습니다.52) 이 응답은 겸손의 은총으로 자신을 앞에 내세우지 않고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 나에게 배워라”(마태 11,29)라고 말씀하신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촉진하는 이들의 반응입니다.


복음의 논리에 따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은 오직 탐구의 열망을 일깨우는 질문을 제기하는 것입니다. 나머지는 하느님의 감추어진 업적입니다.


***


81) 우리가 본 것처럼, 우리는 친구들을 비롯하여 완전히 낯선 이들과 나란히 디지털 고속도로를 여행하며 도중에 많은 함정을 피하려고 노력하고 길가에서 다친 이를 인식하게 됩니다. 때로는 다친 이가 또 다른 누군가 사람일 수 있습니다. 때때로 우리 자신이 다친 이가 될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일이 일어날 때 우리는 잠시 멈추게 되고, 성사 안에서 부여 받아 우리 안에서 활동하시는 생명을 통하여 이 인식은 만남이 됩니다. 곧 화면의 문자나 이미지로부터 다친 이가 이웃, 형제나 자매의 모습을 띠게 되며, 참으로 주님이 됩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 그리고 때때로 우리 또한 다친 이가 되었을 때, 연민으로 우리에게 몸을 구부리는 사마리아인 또한 우리의 상처를 돌보시고자 고통받는 인류에게 몸을 구부리시며 우리의 이웃이 되신 주님의 얼굴을 지닙니다.


어느 경우든 소셜 미디어 플랫폼에서 우연한 만남이나 무심한 참여로 시작하였을 수 있는 것이 자비로 가득 찬 만남 안에서 서로에게 현존하는 사람들로 바뀝니다. 이 자비는 우리에게 하느님 나라와 거룩한 삼위일체에 뿌리를 둔 친교를 이미 지금 맛볼 수 있게 합니다. 이는 참된 “약속의 땅”입니다.


82) 그러므로 인간 삶의 이러한 디지털 영역에서 우리가 사랑하며 참된 현존으로써 요한 성인과 바오로 성인이 그들의 편지에서 간절히 바라던 길이 열릴 수 있을 것입니다. 이는 곧 다친 모든 이가 주님의 몸인 교회와 얼굴을 마주하는 만남입니다. 그리하여 마음과 마음의 인격적 만남 안에서 그들의 상처와 우리의 상처는 치유되고 “우리의 기쁨이 충만해질 것입니다”(2요한 1,12).


***


“다친 사람의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부어주고 그를 보살펴 준 착한 사마리아인의 모습이 우리의 길잡이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의사소통이 고통을 달래 주는 향유가 되고 사람들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맛 좋은 포도주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비추는 빛은 속임수나 특수 효과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상처받고 길가에 버려진 이들에게 사랑과 애정으로 ‘이웃’이 되는 우리의 힘에서 나와야 합니다”.53)


바티칸 시국

2023년 5월 28일

성령 강림 대축일

장관 파올로 루피니 박사

차관 루시오 아드리안 루이스 몬시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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