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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담화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제58차 홍보 주일 담화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24-03-20 조회수 : 602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제58차 홍보 주일 담화

(2024년 5월 12일)


인공 지능과 마음의 지혜: 

온전한 인간 커뮤니케이션을 향하여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인공 지능 체계의 발전은, 제가 올해 세계 평화의 날 담화에서도 성찰한 주제로서, 정보와 커뮤니케이션 세계에 그리고 이를 통하여 사회생활의 일정 부분의 토대에 근본적인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해당 분야 전문가들만이 아니라 모든 이에게 영향을 줍니다. 우리 대부분의 이해와 인식 능력을 넘어서는 활동과 잠재력을 갖춘 이 놀라운 혁신의 빠른 전파는 열광과 동시에 혼란을 가져오는 것임이 드러났습니다. 이는 필연적으로 인간 존재의 본성과 특수성, 그리고 인공 지능 시대에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 종(種)의 미래에 관한 더욱 심오한 질문들로 이어집니다. 어떻게 우리는 온전한 인간으로 남을 수 있고 또 이 문화적 변화가 선에 봉사하도록 이끌 수 있겠습니까? 


마음에서 출발하기


무엇보다 먼저, 재앙에 대한 예측과 우리를 무력하게 만드는 그 영향력에 관한 생각은 제쳐 둘 필요가 있습니다. 로마노 과르디니는 한 세기 전에 이미 기술과 인류에 관하여 성찰했습니다. 과르디니는 우리에게, “사라져 버릴 운명인 아름다운 세상을 보존”하고자 “새로운 것”을 거부하지 말라고 촉구했습니다. 아울러 그는 예언자적으로 경고했습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되어 감의 과정 안에 있습니다. 저마다의 길에서 우리는 …… 열린 마음으로 그러나 또한 그 안에 있는 파괴적이고 비인간적인 모든 것을 민감하게 느끼면서 이 과정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끝을 맺습니다. “이는 기술적, 과학적, 정치적 문제들입니다. 그러나 인간성에서 시작하지 않으면 이 문제들을 해결할 수 없습니다. 더욱 깊이 있는 영성과 새로운 자유와 내면을 선사받은 새로운 인간 유형의 모습을 갖추어야 합니다.” 1)


오늘날 기술은 풍요로워져도 인간성은 빈약해질 위험이 있는 이때에 우리의 성찰은 인간의 마음에서 출발하여야 합니다. 2) 현실을 바라보는 영적 관점을 갖추어야만, 마음의 지혜를 회복해야만, 우리는 우리 시대의 새로움을 읽고 해석할 수 있으며 온전한 인간 커뮤니케이션으로 가는 길을 재발견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마음을 자유의 자리이며 삶의 가장 중요한 결정이 이루어지는 자리로 봅니다. 마음은 온전함과 일치의 상징이지만, 우리의 다양한 감정과 열망과 꿈도 불러일으킵니다. 무엇보다도 마음은 우리가 하느님을 만나는 내적 자리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의 지혜는, 우리가 전체와 부분, 우리의 결정과 그 결과, 우리의 고결함과 취약함, 우리의 과거와 미래, 우리의 개성과 더 큰 공동체 안의 소속감을 한데 통합할 수 있게 하는 덕(德)입니다.


이러한 마음의 지혜는 그를 찾는 이들이 쉽게 발견하고 그를 사랑하는 이들이 쉽게 알아볼 수 있도록 자신을 드러냅니다. 마음의 지혜는 자기를 갈망하는 이들에게 미리 다가가며, 자기에게 맞갖은 이들을 스스로 찾아 돌아다닙니다(지혜 6,12-16 참조). 마음의 지혜는 충고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이들(잠언 13,10 참조), 유순하고 듣는 마음을 받은 이들(1열왕 3,9 참조)과 함께합니다. 성령의 선물인 마음의 지혜는, 우리가 하느님의 눈으로 사물을 보고 관계와 상황과 사건을 이해하며 그 참된 의미를 발견하게 합니다. 이러한 지혜가 없다면 삶은 따분해집니다. 지혜의 라틴말 어원 ‘사페레’(sapere)가 명사 ‘사포르’(sapor)와 상통하듯, 삶에 ‘맛’(savour)을 더하는 것은 바로 지혜이기 때문입니다. 


기회와 위험


이러한 지혜는 기계에서 찾을 수 없습니다. 과학 문헌에서 쓰는 좀 더 적확한 용어인 ‘머신 러닝’(machine learning)을 ‘인공 지능’이라는 용어가 이제 대신하게 되었지만, ‘지능’이라는 말의 사용 자체는 오해를 부를 수 있습니다. 기계가 데이터의 저장과 연결에서 인간에 비하면 한없이 큰 능력을 지닌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인간만이 그러한 데이터의 의미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이는 그저 기계를 좀 더 인간적으로 보이게 하는 문제가 아니라, 전능(全能)이라는 환상이 불러온 최면에서 인류를 깨우는 문제입니다. 이러한 환상은, 우리 인간이 모든 사회적 유대 관계에서 분리되고 피조물인 자기 처지를 잊은 채 완전히 자율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주체라는 믿음에 기반합니다.  


인간 존재는 자기 자신으로는 부족하다는 사실을 언제나 인식하고, 최대한 모든 수단을 이용하여 그 취약성에서 벗어날 길을 찾아 왔습니다. 팔의 연장 수단으로 사용한 선사 시대의 유물부터, 소통하는 말의 연장 수단으로 사용한 미디어를 거쳐, 이제 우리는 인간 사고를 보조하는 고도의 복잡한 기계도 만들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 없이 하느님처럼 되고자 했던 원초적 유혹(창세 3장 참조), 곧 하느님의 선물로 거저 받은 것을 다른 이들과 함께 누리기보다 혼자만의 힘으로 움켜쥐고자 하는 유혹은 이 모든 도구를 남용하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 마음이 기우는 데에 따라 손 닿는 모든 것이 기회가 되기도 위협이 되기도 합니다. 소통과 친교를 위하여 창조된 우리의 몸 자체가 공격의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인류의 모든 기술적 확장은 사랑 가득한 봉사의 수단이 될 수도 있지만 적대적인 지배의 수단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인공 지능 체계는 무지를 극복하고 서로 다른 민족과 세대 사이의 정보 교류를 증진하는 데에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인공 지능은 대대로 이어온 방대한 지식 기록 유산에 접근할 수 있게 하고 이를 이해할 수 있게 합니다. 또는 공용어를 사용하지 않는 개인들이 서로 소통할 수 있게 합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인공 지능 체계는, 부분 또는 전부 거짓인 이야기를 마치 참인 것처럼 믿고 공유하게 만들면서 현실을 왜곡시키는 ‘인지적 오염’의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오래 전부터 있어 온 가짜 뉴스3)의 형태를 띤 허위 정보 문제를 생각해 보는 것으로도 충분할 것입니다. 오늘날에는 ‘딥페이크’(deepfakes)를 활용한 허위 정보의 문제, 곧 완벽하게 진짜 같아 보이지만 거짓인 영상의 제작과 유포(저 또한 그 대상이 된 적이 있습니다.) 또는 어떤 이의 목소리를 이용하여 그 사람이 결코 발언한 적이 없는 것을 말하는 음성 메시지의 제작과 유포라는 문제가 있습니다. 이와 같은 프로그램의 기저에 있는 시뮬레이션 기술은 어떤 특수 분야에서는 유용할 수 있지만, 우리가 타인과 그리고 현실과 맺는 관계를 왜곡하는 곳에서는 타락하게 됩니다. 


인공 지능의 첫 물결인 소셜 미디어의 물결이 일기 시작한 때부터 우리는 그 양면성을 경험해 왔습니다. 인공 지능의 가능성뿐만 아니라 그 위험성과 이에 따른 병폐도 경험해 온 것입니다. 생성형 인공 지능의 두 번째 단계가 어떤 질적 도약을 보여 준다는 데에는 논란의 여지가 없지만, 그러하기에 잘못된 사람의 손에 들어가면 혼란스러운 상황으로 이어질 수 있는 수단들을 이해하고 평가하며 규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인간의 지능과 기술로 생겨난 다른 모든 산물과 마찬가지로 알고리즘은 중립적이지 않습니다. 이러한 까닭에, 윤리적 규제의 모델들을 제시함으로써 예방 조치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는 인공 지능 체계의 사용에 따른 해롭고 차별적이며 사회적으로 부조리한 영향을 방지하기 위한 것입니다. 또한 다원성 감소나 여론 양극화, 획일적 사고 형성을 목적으로 하는 인공 지능 체계의 오용에 맞서기 위한 것입니다. 저는 “다양한 유형의 인공 지능의 개발과 사용을 규제하는 구속력 있는 국제 조약을 채택하고자 …… 국제 공동체가 함께 힘써 주기를”4) 다시 한번 호소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모든 상황에서 그러하듯이 규제 그 자체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인류 안에서 성장하기


우리는 모두 인류 안에서 그리고 인류로서 함께 성장하도록 부름받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도전 과제는 다민족, 다원주의, 다종교, 다문화의 복합적인 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질적 도약을 이루는 것입니다. 우리는 커뮤니케이션과 지식의 이 새로운 수단들의 이론적 발전과 실제 사용에 대하여 신중하게 성찰하도록 부름받고 있습니다. 이 새로운 수단들이 지니는 선을 위한 큰 가능성에는, 모든 것을 추상적인 셈법으로 변환시켜 개개인을 데이터로, 사고를 기계적인 과정으로, 경험을 별개의 사례들로, 선을 이윤으로 환산시켜 버릴 위험이 따릅니다. 무엇보다 각 개인의 고유성과 역사를 부정해 버릴 위험도 있습니다. 현실의 구체성은 넘쳐나는 통계 데이터 안에 흡수되어 버립니다.


디지털 혁명은 우리에게 더 큰 자유를 가져다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디지털 혁명이 오늘날 ‘반향실’(echo chambers)이라고 일컫는 틀에 우리를 가두어 놓을 때에는 그렇지 않습니다. 이러한 경우, 정보의 다원성이 증대되기 보다 우리 스스로 혼란의 수렁에 빠져 시장이나 권력의 이익을 위한 먹잇감이 될 위험이 있습니다. 인공 지능의 활용이 집단 사고로, 검증되지 않은 데이터 수집으로, 집단 편집을 통한 책임 회피로 이어지는 것은 용납할 수 없습니다. 기계 운영에 아무리 유용하더라도 ‘빅 데이터’(big data) 안에서 현실을 묘사하는 것은 대인 커뮤니케이션을 방해하고 우리 인류 자체를 위협하여 결국 사물의 진리를 근본적으로 잃어버리게 만듭니다. 정보는 살아 있는 관계들과 분리될 수 없습니다. 현실 세계에 자리하고 있는 몸을 포함하는 이러한 관계들은 데이터뿐만 아니라 인간 경험의 상관관계도 아우르며, 얼굴과 그 표정을 알아차리는 감수성과 연민과 나눔을 필요로 합니다.


여기에서 저는 전쟁에 대한 보도와, 허위 정보의 대량 유포를 통하여 벌어지는 ‘병행전’(parallel war)을 떠올려 봅니다. 또한 자신이 직접 목격한 것을 우리도 볼 수 있게 취재하다가 다치거나 목숨을 잃은 모든 기자를 생각합니다. 아이들을 비롯하여 사람들이 겪는 고통을 직접 접할 때에야 우리는 비로소 전쟁의 부조리함을 인식하게 됩니다.


인공 지능의 활용은 커뮤니케이션 분야에 긍정적인 기여를 할 수 있습니다. 인공 지능의 활용이 현장에서 언론이 하는 역할을 없애지 않고 이를 뒷받침한다면, 커뮤니케이션의 전문성을 중요하게 여기면서 모든 전달자가 각자의 책임을 더 잘 인식하게 한다면, 그리고 모든 사람이 본분에 맞게 분별력을 가지고 커뮤니케이션 활동에 참여하게 한다면 그럴 수 있습니다. 


현재와 미래를 위한 질문들


이와 관련하여 자연스럽게 많은 질문이 제기됩니다. 정보와 커뮤니케이션 분야에 몸담고 있는 종사자들의 전문성과 존엄성 그리고 전 세계 사용자들의 존엄성을 보호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플랫폼의 상호 운용성을 보장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디지털 플랫폼을 개발하는 기업이 전통 커뮤니케이션 매체의 편집자들과 마찬가지로 콘텐츠와 광고에 대한 책임을 받아들일 수 있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색인의 생성과 해제를 위한, 그리고 인물이나 의견, 역사, 문화를 제시하거나 지워버릴 수 있는 검색 엔진을 위한 알고리즘 작동 기준을 어떻게 해야 더욱 투명하게 만들 수 있습니까? 정보 처리의 투명성을 어떻게 보장합니까? 글의 친저성(親著性)과, 익명성의 방패 뒤에 숨은 출처의 추적 가능성을 어떻게 확인합니까? 이미지나 동영상이 사건을 묘사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가상으로 만들어진 것인지 어떻게 분명히 알 수 있습니까? 출처들이 단 하나로 축소되어, 알고리즘을 기반으로 개발되는 단일 접근 방식을 조장하지 않도록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다원성을 보존하고 복합적인 현실을 드러내는 데에 적합한 환경을 조성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처럼 매우 강력하지만 엄청난 비용이 들고 에너지 소모적인 기술을 지속 가능하게 만들려면 어떻게 하면 됩니까? 이 기술에 개발도상국도 접근할 수 있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를 비롯한 여러 질문에 우리가 어떤 답을 제시하느냐에 따라 앞날이 결정될 것입니다. 인공 지능이 정보 접근성에 기반한 새로운 사회 계급들을 만들어 낸다면 새로운 형태의 착취와 불평등을 야기할 수 있습니다. 아니면 이와 정반대로, 매우 체계적이고 다원적인 정보 네트워크 안에서 개인들과 민족들의 많은 요구를 인지할 수 있게 되면서 우리가 현재 겪고 있는 시대 변화에 대한 인식을 심화시키고 올바른 정보를 증진한다면, 인공 지능은 더 큰 평등으로 우리를 이끌 수 있습니다. 한편으로 우리가 새로운 종살이 형태의 망령을 엿볼 수 있다면,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더 큰 자유의 수단을 그려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선택받은 소수가 다른 이들의 생각을 좌우할 가능성, 아니면 모든 사람이 생각을 발전시켜 나가는 데에 참여할 가능성, 이 둘 중 하나입니다.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답은 미리 정해진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달려 있습니다. 우리가 알고리즘의 먹잇감이 될 것인지, 아니면 지혜를 기르는 데에 반드시 필요한 자유로 우리 마음에 자양분을 줄 것인지는 우리에게 달린 것입니다. 시간을 현명하게 사용하고 우리의 취약한 부분들을 포용할 때 지혜가 무르익습니다. 지혜는 세대 간에, 곧 과거를 기억하는 사람들과 미래를 내다보는 사람들 사이에 이루는 연대 안에서 자랍니다. 함께할 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식별하고 깨어 살피는 역량, 그리고 사물을 그 본연의 충만함에 비추어 바라보는 역량을 키울 수 있습니다. 우리 인류가 방향을 잃지 않도록 지혜를 구합시다. 지혜는 모든 것에 앞서 존재하였고(집회 1,4 참조), 깨끗한 마음들 안으로 들어가 그들을 하느님의 벗과 예언자로 만듭니다(지혜 7,27 참조). 지혜는 우리가 인공 지능 체계를 온전한 인간 커뮤니케이션에 봉사하도록 이끄는 데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로마 성 요한 라테라노 대성전에서

2024년 1월 24일


프란치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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