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가르침

교황 담화제59차 성소 주일 담화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22-05-02 조회수 : 1444

프란치스코 교황 성하의 

제59차 성소 주일 담화

(2022년 5월 8일)

인류 가족을 이루라는 부르심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전쟁과 탄압이라는 냉혹한 바람이 불어닥치고 양극화의 징표들을 빈번히 마주하고 있는 이때에 우리 교회는 시노드 과정을 시작하였습니다. 우리는 경청, 참여, 나눔의 정신을 키워나가며 함께하는 여정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것을 느낍니다. 우리는 선의를 지닌 모든 이와 더불어 인류 가족을 이루고 인류 가족의 상처를 치유하며 더 나은 미래로 이끄는 데에 도움을 주고자 합니다. 제59차 성소 주일을 맞이하여 저는 시노드 정신을 살아가는 교회, 곧 하느님과 세상에 귀 기울이는 교회라는 맥락 안에서 ‘성소’의 더 넓은 의미를 여러분과 함께 성찰하고자 합니다. 


모든 이가 교회 사명의 주체가 되라는 부르심


함께하는 여정인 시노달리타스(synodalitas)는 교회의 본질적인 성소입니다. 이러한 지평 안에서만 다양한 성소와 은사와 직무를 식별하고 소중하게 여길 수 있습니다. 우리는, 교회가 복음을 전하고 자기 바깥으로 나가며 역사 안에 복음의 씨앗을 뿌리기 위하여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명은, 사목 활동의 모든 영역이 다 함께 어우러져 일하고 더욱 중요하게는 주님의 모든 제자를 참여시킬 때에만 수행될 수 있습니다. “하느님 백성의 모든 구성원은 그들이 받은 세례에 힘입어 선교하는 제자가 되었습니다(마태 28,19 참조). 세례 받은 모든 이는 교회 안의 역할이나 신앙 교육의 수준에 상관없이 복음화의 능동적인 주체입니다”(교황 권고 「복음의 기쁨」[Evangelii Gaudium], 120항). 우리는 사제와 평신도를 구분하는 사고방식, 곧 사제는 주체이고 평신도는 실행자라는 사고방식을 경계하며, 평신도와 사목자가 하느님의 한 백성으로 그리스도의 사명을 함께 이어 나가야만 합니다. 교회 전체는 복음을 전하는 공동체입니다. 


서로의 보호자 그리고 피조물의 보호자가 되라는 부르심


‘성소’라는 단어를 그저 특별한 축성 생활을 통해서 주님을 따르는 이들을 지칭하는 단어로 한정을 지어 이해하여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모두 분열된 인류를 다시 하나로 만들고 인류가 하느님과 화해하도록 하는 그리스도의 사명에 함께 참여하라고 부름받았습니다. 모든 이는, 심지어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리스도 신앙을 받아들이기도 전에 생명이라는 선물과 함께 근본적인 부름을 받습니다. 우리는 저마다 하느님께서 바라시고 사랑하셔서 창조된 피조물입니다. 하느님 마음 안에는 우리 저마다가 차지하는 유일하고 특별한 자리가 있습니다. 우리는 삶의 순간순간마다 모든 이의 마음 안에 존재하는 이 거룩한 불꽃을 키워서, 사랑과 상호 수용에 힘입은 인류의 성장에 이바지하라고 부름받았습니다. 우리는 서로의 보호자가 되라고, 화합과 나눔의 유대를 강화하라고, 피조물의 아름다움이 훼손되지 않도록 피조물의 상처를 치유하라고 부름받았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피조물의 눈부시게 훌륭한 공동의 집에서, 그 구성 요소들의 조화로운 다양성 안에서 단 하나의 가족이 되라고 부름받았습니다. 이러한 넓은 의미에서 개개인들뿐만 아니라 민족, 공동체, 다양한 분야의 단체들도 ‘성소’를 가집니다. 

 

하느님 눈길을 환대하라는 부르심


하느님께서는 이 위대한 공동 성소 안에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특별한 부르심을 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사랑으로 우리 삶을 어루만지시며 우리의 최종 목적, 곧 죽음의 문턱을 뛰어넘는 충만으로 이끄십니다. 이렇게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삶을 보고자 하셨고 또 지금도 보고 계십니다.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Michelangelo Buonarroti)는 이러한 말을 남겼다고 합니다. “모든 돌덩어리는 조각상을 품고 있습니다. 그것을 발견하는 것이 조각가의 일입니다.” 예술가의 눈길이 참으로 이럴진대, 하물며 우리를 바라보시는 하느님 눈길은 얼마나 더 그러하시겠습니까! 하느님께서는 나자렛의 젊은 여인에게서 하느님의 어머니를 보셨습니다. 어부 시몬 바르요나에게서 장차 교회의 반석으로 삼으실 베드로를 보셨습니다. 레위라는 세리에게서 사도이자 복음사가인 마태오를 알아보셨습니다. 또한 그리스도인들의 가혹한 박해자 사울에게서 이방인의 사도 바오로를 보셨습니다. 하느님 사랑의 눈길은 늘 우리에게 닿아 있고 우리를 어루만지며, 우리를 해방시키고 변화시켜 우리가 새사람이 되게 합니다. 


바로 이것이 모든 성소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우리를 부르시는 하느님의 눈길을 우리는 받고 있습니다. 거룩함과 마찬가지로 성소도 극히 일부에게만 해당하는 특별한 경험이 아닙니다. ‘이웃집 성인들의 거룩함’이 있는 것처럼(교황 권고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Gaudete et Exsultate], 6-9항 참조), 모든 이에게 주어진 성소도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모든 이를 바라보시고 또 부르시기 때문입니다.


극동의 속담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현자는 알에서 독수리를 알아볼 수 있고, 씨앗에서 큰 나무를 알아보며, 죄인에게서 성인을 알아본다.” 이것이 하느님께서 우리를 바라보시는 방식입니다. 그분께서는 우리 각자에게서, 때로는 우리 자신도 모르는 잠재력을 알아보시고 공동선에 봉사하는 데에 이 잠재력을 발휘하도록 우리 삶 내내 지치시지 않고 일하십니다. 


거룩한 조각가이신 분의 솜씨 덕분에 성소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그분께서는 당신 ‘손’으로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서 벗어나 부름받은 그 걸작이 되게 하십니다. 우리를 자기중심성에서 해방시켜 주시는 하느님 말씀은 특히 우리를 정화해 주고 밝혀 주며 다시 태어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맡겨 주시는 성소에 더욱더 마음이 열리도록 하느님 말씀에 귀 기울입시다! 또한 믿음 안의 형제자매들에게 경청하는 법을 배웁시다. 우리가 나아가야 할 언제나 새로운 길을 보여 주시는 하느님 계획이 드러나는 데에 그들의 조언과 모범이 도움을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눈길에 응답하라는 부르심


사랑과 창조의 하느님 눈길은 예수님을 통하여 완전히 독자적인 방식으로 우리에게 닿았습니다. 마르코 복음사가는 부자 청년의 이야기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사랑스럽게 바라보셨다”(마르 10,21). 이처럼 사랑이 넘치는 예수님의 눈길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머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예수님의 이러한 눈길에 마음을 움직여 우리 자신에게서 벗어나도록 그분의 이끄심에 우리를 내어 맡깁시다! 또한 우리가 서로 바라보는 법을 배워, 어떤 이든 우리와 함께 살아가고 만나는 모든 이가 환대받는다고 느끼고, ‘어떤 분’께서 사랑을 담아 바라보시며 그들이 지닌 모든 잠재력을 일깨우도록 초대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합시다.  


우리의 삶은 이러한 눈길을 환대할 때 변화합니다. 모든 것이 우리 자신과 주님 그리고 우리 자신과 다른 이들이 나누는 성소의 대화가 됩니다. 깊이 있는 대화는 우리가 더욱더 본연의 모습이 되게 만듭니다. 사제 성소 안에서 그리스도의 은총과 자비의 도구가 됩니다. 축성 생활 성소 안에서 하느님 찬미와 새 인류의 예언이 됩니다. 혼인 성소 안에서 서로에게 선물이 되며 생명을 낳고 가르치는 사람이 됩니다. 다른 이들과 세상을 하느님의 눈으로 바라보라고 우리를 부르는 모든 교회적 성소와 직무 안에서 우리의 말과 행동을 통하여 선에 봉사하고 사랑을 널리 전하게 됩니다.


이제 저는 의사 호세 그레고리오 에르난데스 시스네로스(José Gregorio Hernández Cisneros)의 경험에 관하여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베네수엘라 카라카스에서 의사로 일하면서 그는 프란치스코회 3회원이 되고자 하였습니다. 이후에 수도자이며 사제가 되고 싶다고 생각하였지만, 건강이 여의치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성소가 의학 전문의라는 것을 깨달아, 그 무엇보다도 가난한 이들에게 봉사하는 데에 자신을 모두 바치며 살았습니다. 그는 ‘스페인 독감’으로 알려진 세계적 유행병에 감염된 이들에게 아낌없이 헌신하였습니다. 그는 환자들 가운데 고령의 환자 한 명을 위하여 약을 사서 약국을 나오는 길에 차에 치여 선종하였습니다. 주님의 부르심을 받아들이고 그 부르심을 온전히 끌어안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보여 준 모범적인 증인인 그는 일 년 전에 시복되었습니다. 


형제적 세상을 이루라는 부르심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개별적으로만 성소를 받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함께 부름받았습니다. 우리는 모자이크를 이루는 조각들과 같습니다. 각각 그 자체로도 사랑스럽지만 모두 함께 모여 있을 때에만 하나의 그림을 이룹니다. 우리는 저마다 하느님 마음에 있는 별처럼 그리고 우주 창공에 있는 별처럼 빛납니다. 그렇지만 동시에 우리는 우리가 살아가는 자리에서 시작하여 인류의 길을 이끌고 비출 수 있는 별자리를 이루라고 부름받았습니다. 이것이 교회의 신비입니다. 다름의 향연 안에서 인류가 부름받은 모든 표징이자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까닭에 교회는 더욱더 시노드 정신을 살아가야 합니다. 교회는 조화로운 다양성 안에서 일치하여 함께 걸어갈 수 있어야 합니다. 교회는 모든 이가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고 모든 이가 이바지할 몫을 지닌 곳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성소’에 관하여 말할 때에는, 이런저런 삶의 방식을 선택하는 것, 특정 직무에 자신의 삶을 헌신하는 것, 또는 수도 가족, 운동 또는 교회적 공동체의 은사에 이끌리는 것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느님의 꿈을 실현하는 것이며,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요한 17,21)라고 기도하실 때 품으셨던 형제애의 위대한 전망을 실현하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그리고 더 넓게는 사회 안에서 각 성소는 공동의 목적에 이바지합니다. 성령께서만 이루실 수 있는 다양한 은총의 조화를 모든 이 가운데 널리 알리려는 목적입니다. 사제, 남녀 축성 생활자, 평신도 여러분, 사랑으로 일치한 하나의 위대한 인류 가족은 이상적 전망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신 바로 그 목적이라는 진리를 증언하기 위하여 우리 함께 걸어가고 일합시다.


형제자매 여러분, 역사의 비극적인 사건들이 벌어지고 있는 가운데에서 하느님 백성이 이러한 부르심에 더욱 잘 응답하도록 기도합시다. 우리가 모두 이 위대한 하느님 계획 안에서 우리 자신의 고유한 자리를 찾고 최선을 다하도록 성령의 빛을 청합시다!



로마 성 요한 라테라노 대성전에서

2022년 5월 8일

부활 제4주일


프란치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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